이승에서 몸 말리기!!

필자의 부모는 1944년 결혼해 1990년 남편(김택동)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6년간 해로했다.
필자의 부모는 1944년 결혼해 1990년 남편(김택동)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6년간 해로했다.

돌아가신 내 아버님을 소환하는 일은 너무도 착잡하다. 파란과 굴곡의 파노라마 아닌 인생 몇이나 되랴! 정계든 재계든 사회에 드러난 인물은 아니었으나 가히 시대의 풍운아 임에는 틀림 없다.

막내딸이었던 우리 집에서 떠나시고 채 넉 달이 되지 않았을 때다. 관악산에 오르셨다가 허리가 찰칵 내려앉아 등산객 중에 어느 집 청년의 등에 업혀 하산하신 후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양방으로 한방으로 두루 수소문하며 오빠 내외가 수고를 다 하셨다. 그러나 골다공증이 시작되어 물러나는 뼈가 신경을 누르니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고 화장실을 기어서도 가실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단식에 드셨다. 단식 시작 후 약 석 달 만에 파란 많은 인생을 스스로 접으신 것이다.

슬하에 1남2녀를 둔 필자의 부친 고 김택동(왼쪽)씨와 모친 이수방(오른쪽)씨가 1977년 큰아들의 결혼식 때 나란히 섰다.
슬하에 1남2녀를 둔 필자의 부친 고 김택동(왼쪽)씨와 모친 이수방(오른쪽)씨가 1977년 큰아들의 결혼식 때 나란히 섰다.

내가 90년대 중반 역사를 찾는 사람들 모임인 <역찾사>와 합류하게 되었을 때는 고 김진균 선생이 역찾사를 떠나시고 난 후였다. 그분들이 계셨으면 안동 김가 계보에 대해 더 설명이 수월하였으리라. 당시에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타계하신 충북대 유초하 교수, 그리고 현재 대진대 동양철학의 권인호 교수가 계셨던 때다. 필자가 안동 김가라고 하자 이분들이 상당히 꺼리던 것이 기억난다.

조선조, 조정을 쥐락펴락, 당파와 당쟁으로 조정뿐 아니라 나라를 어지럽히던 역사의 원흉 안동김씨! 세도가 하도 막중하여 안동김씨는 발톱의 때까지 양반이더라! 하던 문장이 세간에 회자 되기도 했던 그 안동 김가이시다.

고려개국 삼태사의 한 분이신 신 안동김씨 시조 태사공으로 ”선평“이라는 휘자를 가지신 분의 28세 손이다. 대대로 불천지위가 네 분이나 된다는 종가의 종손이셨다. 그 중에 13대 조는 선원((仙源)이신 분으로 휘자가 상용(尙容)이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위글은 우리 모두가 역사에서 배웠던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시조 한 수이다. 그런데 김상헌은 김상용 어른의 동생으로, 두 어른은 청의 태종이 12만 대군을 끌고 와 우리나라를 겁박할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함께 47일을 대치할 때 끝까지 청과 싸우되 비굴한 항복은 절대 안 된다는 척화파의 거두, 두 분이셨다. 화친파의 대표격인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적진에 가지고 가려 하자 국서를 찢고 통곡했다는 김상헌은 당시 예조판서로 인조가 청에 굴복하고 나서 식음을 전폐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 두 분뿐 아니라 척화파에는 당시 삼학사(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가 있었는데 청 태종은 삼학사를 잡아다 온갖 회유를 다하지만 끝내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태종은 이들을 참형한 후 삼 년 뒤 김상헌을 또한 위험인물이라 하여 심양으로 끌고 가 4년간 옥살이를 시키는데 끌려가면서 지금의 북한산, 다시 말해 삼각산과 한강을 바라다보며 지으신 것이 위의 글이다.

또한 상용 어른은 병자호란 당시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초문에 쌓아놓은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98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에 다녀온 뒤 도승지·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1630년(인조 8) 기로사(嗜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는 것이 정사에 나오는 그분의 삶의 흔적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당시 가문에 내려오는 사서에는 이런 사연도 있다. 김상용 어른의 슬하에는 당시 7세이던 영특한 손자가 있었다고 한다. 원자와 궁중의 비빈을 모시고 강화도에 상륙하여 여장을 풀고 대충 안착을 돕는 조부의 소매자락을 붙들고 절대 떠나지 않았다 하니 할아버지의 내심을 이미 눈치채고 그렇게 울면서 매달렸다고 한다.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이 손자를 떼어놓기 위해 갖은 수를 다하셨으나 도저히 되지 않아 강화도 탄약고에 불을 지르고 몸을 던지실 때 함께 산화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오리나 떨어진 밭에 그 손자의 신발 한 짝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택자 동자를 쓰셨던 필자의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당대에 내세울 것이 없어 가문의 선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조의 정쟁과 당파와 외척으로 조정과 나라를 어지럽히던 가문은 김상헌 어른의 집안으로 이들이 세간에 불리는 장동김씨 계보이다. 상헌 상용 어른들은 문사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그렇게 강직했었는데 어쩌다가 그 정신이 변질되어 역사를 아는 분들이 안동김씨라면 덜래머리를 젓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하마터면 장동 김으로 오인되어 나는 ”역찾사“의 일원이 될 수 없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졌다.

해방 전 부모님 결혼식 사진
해방 전 부모님 결혼식 사진

강직하기로 소문난 우리 아버지는 정신대 등살에 못이겨 결혼을 서두른 우리 어머니와 해방 서너달 전에 신식 결혼을 하셨다. 하객과 같이 찍은 사진에 남성들은 모두 중처럼 머리들이 박박 깎여 있는데 그날의 신랑인 아버지만이 장발이다. 그리고 끝내 창씨개명도 안 하셨던 기개는 아마도 핏줄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분은 말년도 멋지게 장식하셨다. 당시 일흔 여섯이셨다. 단식하여 돌아가신 제 부모의 최후를 갖고 멋지다, 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토록 골다공증이 진행되도록 모르고 있었던 자손으로 천추의 한이 남는다.

이미 중풍이 와서 오른팔을 못 쓰셨던 어머니의 수발까지 들던 아버지로서는 더 이상 아들 며느리에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화장실을 기어서 갈 수 없으니 누구든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데 아들에게도 당신의 국부를 보이는 것을 끔찍해 하셨던 것으로, 작정하고 단식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링거를 꽂아드리면 빼어버리며 항거하시다 딸들이 식사를 유도하기 위해 한우를 사다가 지글거리며 냄새를 피우면 원초적인 유혹에 넘어가 맥주 한 잔에 고기 몇 첨을 드시므로써 아버지의 단식 기간은 석 달 정도로 길어지신 것이다.

욕심 사나운 사람은 자식이라도 용납 안 하시고 불의를 절대 용납지 않으셨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받들려고 노력하며 산다. 대의와 공의를 먼저 앞세우셨던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자 안동 김씨 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일가들이 말한다. 우리 남매들은 가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선대가 남기신 그 실천을 우리도 실천하자고! 구차한 최후, 혹시 남루한 나날만을 남겨놓게 될 때 연명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처럼 단호한 결단으로 최후를 마치기로! (필명  김자현)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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