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바치는 큰딸의 글

이글은 이영섭 주주통신원의  아내되시는 정민숙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2009년 국가정원으로 지정되기 이전 전남 순천의 동천변 유채꽃밭으로 모처럼 가족 나들이를 갔을 때 함께한 어머니 장넙순
2009년 국가정원으로 지정되기 이전 전남 순천의 동천변 유채꽃밭으로 모처럼 가족 나들이를 갔을 때 함께한 어머니 장넙순

그리운 엄마.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 가슴이 아려옵니다. 올해 3월 24일이면 엄마가 제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년이 되는데도 그 당시 멍하니 당했던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에서 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막연하게 부모님의 죽음과 이별을 스치듯 상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번개치듯 내리칠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엄마의 장례식을 정신없이 무감각하게 치르고 나서 지금까지 눈물, 한숨, 후회, 자책감 등 여러 감정을 느끼고 겪으며, 그동안 멀리해 왔던, 내게도 닥칠 노년과 죽음이란 단어가 이제야 확연히 다가오네요. 이제야 철이 드나 싶어 헛웃음만 나와요.

엄마.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 가난한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이 떠올라요.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맨 몸의 건강한 육신과 영혼만 의지한 채 악착같이 피 땀 흘려 살아 온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의 삶 말이에요. 전라도 남녘 순천 왕지동의 가난하고 늙은 소작농의 큰 딸로 태어나서 군입을 줄이기 위해 팔려가듯 남의 집 어린 식모로 일하기도 하시고, 엄마의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남들 학교 다닐 때 공장을 다니신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 시절 남자들은 왜 다들 여자가 가장 역할을 해야 할 정도로 무능력했을까요! 왜 딸들과 아내들이 그 험하고 거친 일들을 군말 없이 다 했어야 했는지 그 시절 어린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제 엄마의 삶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 가끔씩,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는 고운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묘한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결혼 이듬해인 2009년 신혼인 큰딸 부부를 보러 온 부모님과 함께 집 근처 순천 동천변으로 나들이를 갔다. 왼쪽부터 아버지 정혜상씨, 어머니 장넙순씨, 필자 , 남편 이영섭씨
결혼 이듬해인 2009년 신혼인 큰딸 부부를 보러 온 부모님과 함께 집 근처 순천 동천변으로 나들이를 갔다. 왼쪽부터 아버지 정혜상씨, 어머니 장넙순씨, 필자 , 남편 이영섭씨

궁벽한 시골벽지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과 결혼하신 엄마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분이셨어요. 갓 결혼한 젊은 새댁이었던 결혼 초기를 회상하시며 엄마는 베틀일을 못해서 밤 늦게까지 시어머니 밑에서 졸면서 쩔쩔매셨다며 살아보니 도저히 답이 안나온다 싶어 아빠를 설득해서 결혼하고 한 달 만에 시댁을 빠져나와 순천에 달 방을 얻어서 맨손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셨죠. 순하고 무뚝뚝하고 말 없는 아빠를 대신해서 엄마는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일이 많으셨어요.

덕분에 만고에 호인이셨던 아빠의 빚보증과 사기에 휘말려 써보지도 못한 돈을 갚느라 반평생 힘들게 일하셨던 것을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저는 보고 자랐어요. 제 어린 기억에 집에 몰려온 빚쟁이 아줌마, 아저씨들로 인해 무서워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빚을 갚기 위해 큰 아들인 아빠의 명의로 물려준 논밭을 팔아서 화가 나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과 방바닥에 높게 쌓아 올려진 돈다발에 당시 7살이던 저의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는지요. 또한 찬장에 예쁘게 놓여있던 엄마가 아꼈을 꽃무늬 하얀 찻잔이랑 그릇들을 빚쟁이들이 다 가져가 버려서 슬펐던 기억이 아직도 제 뇌리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어요.

주변의 친한 이웃분들이 짠해서인지 서울로 야반도주 하라고 권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에 엄마는 얼마 안되는 가진 재산을 다 팔고도 모자라서 반평생을 하루씩 갚는 일수를 꼬박꼬박 빚쟁이들에게 도장 찍어주며 갚아나가셨어요. 엄마가 쌀 장사를 하시며 장사가 잘 되었는데 빚쟁이들이 다녀간 후로는 이제 돈을 좀 버나 싶었던 그 곳을 떠나야만 했고 그 후로 1년에 여섯 번이 넘게 이사를 다니셔야만 했어요. 연탄 장사일, 벽돌공장 노동, 하숙 등 갖은 일을 하시다가, 나중에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식당을 하신 후로 빚도 갚고 집도 사셨어요. 엄마는 빚을 다 갚은 후 회고하시며 그 때 남들처럼 도망갔으면 너희들은 고아원이나 갔을 거라며 그건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고 제게 말씀하곤 하셨어요.

그 어려웠던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시기에 큰 딸이 엄마에게 정말 고마운 것이 있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책장사가 오면 책들을 사주셔서 그것을 읽고 오늘날 제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찾고 깨어있는 시민이 되도록 힘을 부여해 주셨어요. 또한 피아노란 악기를 배우게 해주셔서 평생 위대한 음악을 알고 사랑하게 해주시고 제 영혼을 살찌게 해주셨어요. 엄마는 그렇게 힘든 삶을 사시면서도 저를 다른 삶을 꿈꾸게 해주셔서 그 고마움과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엄마가 제게 주신 사랑과 은혜를 동생들과 사랑하는 베트남에서 온 올케 김리와 조카들에게 잘 베풀며 그 사랑을 이어 갈께요. 저 세상에 계시면서도 항상 염려하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엄마의 손자 지후, 지성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요. 동생 재호와 김리도 문화와 나이 차이로 인해 가끔씩 티격태격 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엄마에게 물려받은 식당도 잘 운영하고 있어요.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날 조카들이 배타적인 시선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뛰어 오르도록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행동하고 노력할께요. 엄마, 걱정마세요.

엄마! 엄마는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으셨어요.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거라고 생전에 가끔 말씀하시던 엄마의 치열했던 삶. 그 삶을 불효녀 큰 딸이 감히 애도하는 글을 씁니다. 74년 평생 쉬어보지도 못하시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지도 못하시고 일만 하시다가 갑작스럽게 저 세상으로 가셔서 이 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아낌없이 사랑해 주시고 베풀어 주셨는데 사랑한다고 말 한 번 제대로 못한 못난 이 딸을 용서해 주세요.

엄마! 엄마의 인생을 큰 딸로, 큰 며느리로 묵묵히 자기 자리를 흔들림없이 지키며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자식들과 이웃들에게 본보기가 된 엄마. 장넙순의 삶이 어느 명문거족의 삶과 비교해도 부끄럼없이 훌륭하기에 이 글을 올립니다. 엄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984588.html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영섭 주주통신원  foufomi@korea.kr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