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과 정절의 본보기 ‘하기순 선생’

나는 성이 하씨인 분을 만나면 작아진다. 왜 그런가? 할머니는 진주하씨 집안의 규수였다.

‘할머니’, 생각만 스쳐도 나는 울컥한다. 1971년 3월부터 1987년 11월 29일 내가 장가가는 날 아침까지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밥을 먹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인 1968년 어느 추운 날 약 3km를 걸어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는 버선발로 달려오셔서 내 언 손을 볼에 갖다 대셨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어디서 다시 느끼랴.

하기순 선생과 맏손자 형광석
하기순 선생과 맏손자 형광석

‘할아버지’, 어려서 가장 늦게 배운 말이다. 부를 기회가 없었다. 할머니는 1909년생으로 동갑인 할아버지와 만 열다섯을 갓 넘긴 1924년 12월 27일에 혼인하셨다. 친정에서 3년을 묵혔다가 18세인 1927년 어느 좋은 날에 시집으로 오셨다. 친정에서 2남 3녀 중 막내는 이제 맏며느리로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민족 민립학교인 고창고보(현 고창고교)에서 공부하다가 병을 얻으셨다. 추운 방에서 지낸 탓이 컸다고 한다. 첫째 아들은 네 살 무렵에 홍역을 앓다가 하늘로 갔다. 둘째 아들은 1932년 4월에 태어났다. 셋째 아이의 출산을 한 달 앞둔 1937년 7월 할아버지는 ‘우리 부모를 잘 봉양하여 달라.’하고 홀연히 떠나셨다. 그 후 태어난 딸은 아버지를 영영 보지 못했다. 뒤따른 파도가 앞 파도를 덮치듯, 세상은 할머니를 ‘청상과부’(靑孀寡婦)로 불렀다.

하기순 선생과 그 유복녀 형선덕(邢善德)
하기순 선생과 그 유복녀 형선덕(邢善德)

어찌 유혹이 없으랴. 할머니는 용모가 깔끔하고 훤칠하셨다. 할머니의 둘째 오빠는 학식도 풍부하고 기골이 장대하셨다. 재혼하라는 권유도 몇 번 받았다고 한다. 말씀하셨다. “조금도 개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할머니는 정절을 지키는 열녀(烈女)의 길을 걸으셨다. 당시 여러분의 추천으로 1963년 2월 전국선행자표창위원회로부터 표창장(열녀)을 받으셨다. 안방에 걸린 그 표창장은 나의 삿된 언행을 제어하는 균형추였다.

할머니의 온갖 풍상을 기억하는 고장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 마을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에 진주형씨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500년 역사를 자랑한다. 1997년 5월 11일 마을의 비석거리에 세워진 ‘유인진주하씨효열비’(孺人晉州河氏孝烈碑)는 할머니의 효행을 전한다. “시모 또한 병드시매 매양 꿩고기를 원하시더니 하루는 솔개가 문득 꿩을 몰아 꿩이 집에 들어오니 이를 잡아 드려서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하늘이 부인의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고 하였다.”

유인진주하씨효열비’(孺人晉州河氏孝烈碑) / 위치: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비석거리

할머니께서는 가끔 말씀하셨다. “너희 증조부께서는 일제의 농민수탈이 극심한지라 농사에 대한 의욕을 잃고 도장리를 떠나 1943년 4월 광주로 이사하셨지, 그때 물로 배를 채우셨단다. 해방도 못 보시고 한 달 앞서 돌아가셨어야.”

하기순 선생의 시부 형학태(邢學泰) 선생
하기순 선생의 시부 형학태(邢學泰) 선생

할머니는 1949년 후반기에 고향 마을로 되돌아왔다. 집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9.9.17.)에 따르면, 그 집에서 가까운 논에 1951년 3월 17일 진주한 국군이 빨치산 혐의로 살해한 사람은 15명이었다. 양민학살이었다. 1951년 5월 외아들이 군에 입대하자 날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지극정성을 다했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약 30년이 떠나간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참담한 상황을 듣거나 보셨다. 말씀하셨다. “6.25사변 인공 때보다 더 무섭구나.”

하기순 선생의 외아들 형선기(邢善基)와 자부 정기순(鄭基順)
하기순 선생의 외아들 형선기(邢善基)와 자부 정기순(鄭基順)

비문은 말한다. “착하고 글을 잘 지으니 편지글이 매우 훌륭하였다.” 친정 동네는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 마을이다. 조선 성종 임금 때 마을이 들어서면서 심은 은행나무는 지금도 자태가 수려하다. 500여 년의 역사를 아로새긴 이곳은 호남에서 실학을 대표하는 나경적(1690∼1762)과 하백원(1781∼1844) 선생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동네이다. ‘실학 마을’이다. 당시 어느 마을보다도 글을 읽고 쓰기를 좋아했고 여성을 존중했던지, 할머니는 어렸을 적에 글을 많이 필사했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글을 읽고 편지를 쓸 줄 아는 몇 안 되는 여인이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책을 즐겨 읽으셨다. 내게 <장풍운전>을 자주 읽어주셨다. 감동이 밀려와 눈물을 글썽거리시던 할머니의 50여 년 전 모습은 영화의 멋진 장면에 가깝다.

규남 하백원 선생 / 출처: 규남 박물관(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선생 / 출처: 규남 박물관(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음력 1909.6.26.에 태어나 1937.6.4.에 젊은데도 하느님께서 불러 가신 할아버지 형고열, 1909.8.8.에 태어나 1991.12.27.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할머니 하기순 선생이시여! 이렇게 만물이 약동하는 청명한 춘삼월에 혼령으로 오셔서 맏손자가 세계 최고의 언론 <한겨레신문>에 당신을 추모하는 글을 올리오니 기쁘게, 즐겁게, 신나게 굽어보시옵소서.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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