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파편 터진 순간에도 ‘내가 다쳐 다행이다’ 했던 당신”

1975년 3남2녀의 막내인 필자(안재영)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어머니(이간난·왼쪽)와 함께.
1975년 3남2녀의 막내인 필자(안재영)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어머니(이간난·왼쪽)와 함께.

외할머니 생존 위해 네차례나 결혼
아버지와 재혼…마흔에야 호적 생긴 어머니
빚보증에 중풍 쓰러진 부친 7년간 수발

억척 생활력으로 3남 2녀 뒷바라지
나 대신 군불지피다 폭발사고로 얼굴 다쳐
“함께 나들이 한번 못한 채 32년 전 홀연”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탓에 생존을 위해 4번이나 결혼했다고 한다. 1910~20년대 일제강점기 하루하루 입에 풀칠조차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던 가난한 농촌의 삶을 가늠해 볼 수조차 없다. 어머니(이간난)는 그런 할머니의 3번째 남편에게서 1922년 태어났다.

경기도 안성의 일죽이 고향인 어머니는 동네 총각과 혼인했지만 원만한 생활을 못하고 재혼으로 11살 많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도 첫 부인이 정신분열증으로 집을 나가버려 혼자된 딱한 처지였다. 혼란의 시기였기에 어머니는 마흔살이 되어서야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단다.

아버지는 행주산성 인근 행신리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한강 범람으로 망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행신리 땅을 팔고 오지인 파주 장파리(장마루)에 갈대로 뒤덮인 땅을 사서 농토로 일구었다. “농장 안씨”로 불리기까지 평생을 그곳에서 사시다 1982년 12월 초, 돌아가셨다. 향년 71. 그 날짜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독학으로 중졸·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한 내가 또래보다 3년, 그리고 4살 위인 작은 형이 9급 공무원으로 7년 늦게, 대입 학력고사를 함께 마친 이틀 뒤 떠나셨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가 사흘 만 일찍 돌아가셨다면 작은 형과 내 인생은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순박한 농부였다. 열심히 농사지어 그나마 손에 쥐게 된 돈을 친척에게 빌려주고 보증까지 서주는 바람에 집안은 늘 가난했다. 돌아가시기 전 7년을 고혈압과 중풍으로 누워 지냈고, 어머니는 늘 아버지 곁에 붙어있는 자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만큼 어머니는 참으로 억척같이 살아야 했다. 좋다는 한의원은 다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고 애써고, 논농사 밭농사를 혼자 맡아야만 했다.

내 위로 누님 둘, 형님 둘이 있어 모두 3남2녀다. 큰 누님은 10대 말에 일찍 시집을 갔고, 작은 누님은 읍내로 나가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큰 형님도 동네 재건중학 졸업 뒤 상경해 생활비를 벌어가며 야간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때문에 늘 집안에 돈 한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시절 농촌의 집안들 사정이 비슷비슷했을 것이다.

큰 형님이 군에서 제대하기 전까지, 어머니와 10대인 내가 가장이고 일꾼이었다. 일찍 철이 든 나도 정규 중·고 진학은 언감생심이였기에 어른들과 똑같이 모내기, 벼베기, 밭일, 인삼밭일 등을 했다.

하루는 어머니와 같이 논에서 피뽑기를 하다가, 내가 작은 키 때문에 얼굴이 자꾸 찔려 일하기 싫다고 푸념을 하자, 어머니가 논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던 기억도 난다. 부엌 군불 지피기도 종종 내몫이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불을 때다가 나뭇단에 섞여 들어온 총알이 터지면서 파편으로 인해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내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선명하다. “얘야, 오늘은 내가 불을 때서 다행이다.” 정규학교를 못 다닌 내게 교복은 희망이요, 꿈이었다. 상경해서 서점 점원으로 3년 정도 일한 뒤 고교에 입학했지만, 그나마 1학기만 마치고 자퇴하자 “어떻게 들어간 곳인데...” 하며 어머니는 또 눈물을 쏟았다.

1987년 필자가 다니던 대학을 둘러보러 온 어머니(왼쪽)와 함께. 필자는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1983년 뒤늦게 입학했다.
1987년 필자가 다니던 대학을 둘러보러 온 어머니(왼쪽)와 함께. 필자는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1983년 뒤늦게 입학했다.

큰 누님은 3명의 자녀를 대학까지 마치게 한 뒤, 검정고시로 중‧고졸 자격을 따서 70살 넘어 방송통신대학까지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둘째 형님은 공무원으로 야간대학을 다녀 행정고시에 합격하더니 영국 국비유학과 스위스 근무를 마친 뒤 얼마 전 특허청에서 퇴임했다. 작은 누님은 고교시절 주산을 4단까지 따서 졸업하자마자 효성그룹에 입사했다. 결혼 뒤 지금껏 98살 된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어머니는 그 가난한 시절에도 봇짐장수에게 밥을 대접해주던 마음 따뜻한 분이었다. 한평생 고생을 한탄하거나 불평한 적도 없었다. 1989년 추석 명절 준비로 분주할 때 찰떡을 드시더니 호흡곤란이 왔고, 입원 며칠 만에 거짓말처럼 돌아가셨다. 향년 67. 돌이켜 보니, 어머니와 나들이 한번 못해 봤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따뜻한 추억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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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993275.html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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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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