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전교조>에 가입한 이유

1984년 3월, 내가 첫 학교 발령을 받은 곳은 구로고등학교였다. 80년대 학교풍경이 그렇듯이 100m 달리기가 가능한 일자형 학교 건물과 삭막한 운동장이 전부였다. 꽃과 나무는커녕 운동장엔 학생들이 앉아서 쉴 만한 벤치조차 없어 삭막했다. 지어진 지 딱 3년째 되는 학교였다.

지금은 남녀공학이지만 당시엔 남자고등학교였다. 한 교실엔 60명이 넘는 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한 학년 15학급씩 45개 학급이니 전체 학생수가 2,500명을 훌쩍 넘었다. 교사 숫자가 90명 안팎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형적인 거대학교요, 과밀학급이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 조회가 열렸다. 이른바 ‘애국’조회다. 교직원회의는 매일 아침마다 교무실에서 열렸다. 말이 교직원회의이지 교사들 간 토론은 전혀 없었다. 초등학교 학급회의보다 못했다. 부서별로 주임교사(오늘날 부장교사)가 돌아가면서 일어나 업무협조를 당부한다.

부서별 전달과 협조사항이 끝나면 교감이 마이크를 들고 한 마디 훈시하고 마지막엔 학교장이 일어나 일장 훈시를 했다. 학생들 대하듯이 야단도 쳤다. 교사들은 교무실에 빼곡하게 앉아 교무수첩에 지시사항과 협조사항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어떤 날은 서무과장(오늘날 행정실장)도 일어나 수업료 미납 학생들을 독촉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곤 담임교사들을 채근했다.

당시엔 교사들이 몽둥이나 매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다반사였다. 손에 매를 들지 않은 교사가 이상할 정도였다. 교실에서 체벌은 물론이거니와 ‘문제’ 학생들을 교무실로 데리고 내려와 뺨을 때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엎드려뻗쳐>를 시키거나 벽보고 서 있게 하기도 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학생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반교육적인 행위들이었다. 내가 목격한 충격적인 일은 교무실로 학생을 불러내 출석부로 머리통을 후려치는 장면이었다. 후배교사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신망이 있는 선배교육자였는데 그 장면은 당시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런 체벌은 2000년  용산고등학교로 전근 갔을 때도 목격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여러 학생들이 오가는 운동장에서 교사가 학생의 뺨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그것도 근엄한 표정으로!

주변을 가던 아이들은 움찔거리며 흘낏 쳐다볼 뿐 피하는 분위기였다. 그 학교 역시 남자고등학교였는데 어떤 교사는 유독 학생들을 자주 때렸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조금 늦게 교실로 들어가는 학생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불러 세웠다. 그리곤 이유도 묻지 않고 하키채로 한 대씩 후려 갈겼다. 풀 스윙을 하면 아이들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 트위스트를 추는 것이다.

순간 군대 시절 <집합>장면이 떠올랐다. 올챙이처럼 배를 앞으로 불쑥 내밀면 수송부대 선임병이 솨파이프(폴대)로 한 대씩 후려 갈겼다. 그러면 졸병들은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트위스트를 추는 것이다.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내 마음 속엔 그  교사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찼다.  그 학교를 떠나기 전, 몇 년 동안 그 교사와는 인사도 나누지 않고 서로 개  닭보듯했다.  한 번은  어느 날 똑같은 장면을 목격한 뒤에 학교장에게 찾아가 주의를 주라고 경고했다. 주의를 주지 않으면 교육청에 알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교장실을 나서는 나에게 학교장은 비웃듯이 웃고 있었다.  비웃는 듯한 그 웃음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용산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이자  그 잘난  서울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용산고등학교 주변은  당시 주한 미군이 주둔한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엔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80만평 용산동 4가 일대가 그러했다.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 소속 일본군 하사관이나 일본군 장교들 자녀들을 위해 용산동 2가 1번지에 맨 처음 세운 건물이자 산기슭 학교가 바로 용산고등학교다. 내가 그 학교에 근무할 적에도 노년의 일본인들이 가끔 부부동반으로 학교를 찾아와 옛 자취를 더듬곤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체벌교사를 두고 어떤 교사들은 “학교분위기를 잘 잡아준다”고 두둔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부모들 역시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잡아두고 타율학습을 시켜주니 문제 삼지 않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관리>해 준다고 그런 <폭력행위>에 대해 항의하질 않았다. 그저 강제로 붙잡아 놓고서라도, 아니면 두들겨 패서라도 세칭 명문대학 진학률을 높이고 학교에서 입시공부만 시켜주면 당시 부모들은 묵인했던 것 같다.

서울 어느 사립학교에선 강당에 수백 명 되는 학생들을 집어넣고 밖에서 밤 10시까지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학생에게  ‘인권’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장 민주화된 도시, <서울>에서조차 학교는 ‘인권’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학교는 교도소, 군대와 함께 전형적인 인권사각지대였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학교, 교도소, 군대는 학생과 죄수 그리고 군인들 머리를 죄다 빡빡 밀어버렸다. 학교와 교도소, 그리고 군대는 거대한 격리 수용시설이었다. 학교교육 또한 전형적인 통제교육이었다. 그런 걸 ‘교육’이랍시고 100년을 넘게 해왔으니 우리교육이 어떠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2010년부터 학교에서 체벌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체벌도 체벌교사를 징계하겠다”는 진보교육감의 지시사항이 학교 공문을 통해 정식으로 하달된 이후부터 변화된 학교풍경이었다.

70-80년대 교문 지도하는 학교 풍경을 묘사한 <말죽거리 잔혹사> 영화 장면(출처 : 시네21)  엎드려 뻗쳐를 시켜 놓고 몽둥이로  후려 갈기던 시절의 풍경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70-80년대 교문 지도하는 학교 풍경을 묘사한 <말죽거리 잔혹사> 영화 장면(출처 : 시네21) 엎드려 뻗쳐를 시켜 놓고 몽둥이로 후려 갈기던 시절의 풍경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서울 지역 최초 진보교육감인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면서 학교에서 체벌은 일거에 사라졌다. 그전까지 학교에서 학생체벌은 일상적 풍경이다. 아침교문에서 시작하는 복장과 두발 단속부터 시작해서 체벌조차 ‘교육의 방편’이라는 인식이 교사들 사이에 팽배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체벌하듯이 학교에서 아이들 체벌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간혹 부모들 중엔 자신의 아이를 두들겨 패서라도 바로 잡아달라는 분도 계셨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사에게 ‘폭력’교사가 되라고 부추기는 격을 따를 순 없었다. 당시 풍경에선 아이들을 때리지 못하는 교사를 ‘나약한’ 존재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체벌을 통해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잡아주는 교사를 높이 인정해 주는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 포획된 순간, 교사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진다.  글쓴이 또한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무엇이 진정한 교육인지 혼란스러웠다. 개인적 ‧ 집단적 성찰의 부재였다.

심지어 학년 초, 중견 교사들은 자신의 오랜 교직경험을 초임교사들에게 전수한답시고 자랑스럽게 큰소리쳤다. “학년 초인 3월 한 달 동안, 반 아이들을 확실하게 잡아놓아야 1년이 편하다”고 조언을 하곤 했다. 그런 중견 교사들 중에는 젊은 교사들에게 접근해 “설날 학교장에게 세배하러 가자!” 고 은근히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엔 촌지가 횡행하던 시절이라 고3담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세속적 욕망이 강렬한 일부 교사들은 강남지역에선 주임교사보다 담임교사, 그것도 고3 담임교사를 욕망했다. 당시에 고3담임을 몇 년만 하면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다는 풍문까지 나돌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정권 <민교투> 공안조작 사건으로 해직되고 강남으로 복직한 어느 전교조 선생님은 80년대 후반 일그러진 강남학교 풍경을 이렇게  말했다. <고3 담임은 연간 2,000만원, 1학년 담임은 1,500만원, 2학년 담임은 1,000만원이 촌지로 들어온다는 것이 교사들 사이에 공공연한 이야기였다>고 했다.  영등포구 여의도동 어느 부촌 학교에선 <스승의 날> 양주병이 20개 이상 들어온다고 했다. 따라서 학교장에게 밉보일 경우 고3 담임을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1989년 10월 28일 전교조가 주최한 <참교육을 위한 국민걷기 대회>에 전국 45개 지역에서 교사, 시민, 학부모 4만 명이 참여하였다. (출처 : 교육희망)
1989년 10월 28일 전교조가 주최한 <참교육을 위한 국민걷기 대회>에 전국 45개 지역에서 교사, 시민, 학부모 4만 명이 참여하였다. (출처 : 교육희망)

전교조 교사들은 촌지를 거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말 그대로 촌지(寸志), ‘작은 정성’일지라도 교육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목격한 어느 30대 초반 여선생님은 아이의 부모가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은 단감 한 상자조차 그대로 돌려보냈다.  마음 한 편 그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는데 그 여선생님은 단호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여선생님 생각이 옳았다.

당시 지천명의 나이를 갓 넘긴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부모들이 「스승의 날」 건네주는 선물엔 별 생각 없이 넙죽넙죽 받았던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같이 근무했던 어느 전교조 동년배 교사는 강제로 놓고 간 선물을 펼쳐 보지도 않고 구석에 처박아 놓은 채 학교를 떠났다. 적어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질 못했다. 뒤돌아보면 교사로서 철저하지 못했다.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고 또한 적당히 눈 감고 살았다.

교직생활 동안 봉투로 건네받은 촌지는 대부분 편지를 써서 모두 돌려보냈지만 「스승의 날」 선물은 기분 좋게 받았던 기억이 몇 번 있다. 더구나 학년부장이 나서서 학부모대표와 담임들과 상견례 하는 자리에 별 생각 없이 참석했던 적도 있었다. 당연히 돈 봉투가 오가는 그런 자리였다.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2012년  여의도고등학교에 와서도 비슷한 풍경을 목격했다. 학년 초,  학년 대의원을 반별로 뽑는 자리에서 학교는 으레 담임 교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부모들은 담임교사 앞에선 약하지 않은가! 학교는 그걸 이용해서 반별로 대표를 뽑고 그들 학급대표들로 하여금 반별로 발전기금을 걷곤 했던 것이다.

문제는 어느 학급에서 터졌다. 전교조 조합원 교사였던 어느 여선생님이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전교조 분회장인 해직교사 출신 여선생님이 곧장 교장실로 찾아가 엄중히 항의했다. 그러자 매년 연례행사처럼 해왔던 발전기금 갹출행사는 그해부터 사라졌다.  불과 9년 전 이야기이다.  2016년도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학교현장에서 촌지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할 적에 사 오던 음료수나 과일상자도  사라졌다.  그렇게 학교는 단박에 변화했다.

교육은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고 자라나는 어린 영혼들에게 정신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는 행위이다. 그 모든 행위의 중심에 교사가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날 우리 교육은 군부독재정권 하 혼탁한 시류 속에서 권력의 말단 행정요원으로 기능하며 저항할 줄 몰랐다.

정치사회적으로 혼탁하고 부패한 속에서 교육 또한 혼탁하고 부패했다. 학생 ‘인권’은 설 자리조차 없었다. ‘교육’이 존재하지 않는 그 곳에 학생 ‘인권’ 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오로지 「입시교육 = 교육」인양, 학교는 그렇게 덧칠한 모습이었고 대다수 교사 역시 그런 압도된 현실 앞에 침묵했고 또 순응했다. 촌지는 그런 왜곡되고 일그러진 학교교육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따라서 당시 정의감 넘치는 20-30대 젊은 교사들이 그런 역겨운 교육현실 앞에 침묵하고 순치되는 것은 교육자로서 자기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입시교육’이 아니라 「사람 만드는 교육」을 꿈꾸고 학교를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교육공동체」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선 교사 스스로 불의한 군사정권에 맞서 단결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권력의 탄압에 맞서 1989년 7/26 ~ 8/5일까지 11일 동안 전국의 전교조 교사 600여 명이 명동성당에 모여단식 투쟁을 전개했다(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독재권력의 탄압에 맞서 1989년 7/26 ~ 8/5일까지 11일 동안 전국의 전교조 교사 600여 명이 명동성당에 모여단식 투쟁을 전개했다(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사노동조합! 바로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의 탄생은 그런 의미에서 당대 ‘시대정신’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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