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어모장군 전방삭 선무원종공신 록권
어모장군 전방삭 선무원종공신 록권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이기에 출처를 알고자 나름대로 알아봤으나 여의찮다. 지금껏 이 말의 출처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한국 내에서 2010년대 초경 인터넷에서 전파된 말이다. 출처가 불분명한데도 굳이 신채호라고 한 것은 신채호가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한 말로 기록했으나 링크가 사라졌다. 간혹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는 변형이 있지만, 이것도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말로는 독사신론에서 나오는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클 수 없다'정도가 있으나, 흔히 아는 그 명언과는 조금 다르다. 미국의 작가인 데이비드 매컬러는 '과거를 잊은 국가는 기억을 잃은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 ”라고 말했다. 한다. (출처:나무위키)

여기에서 보듯 역사를 잊거나 버린 민족은 미래도, 재생도, 국가관도 모두가 희망이 없다는 말로 통합하여 풀어 본다. 역사는 인간의 기본적 양식이니 잊어서도 안 되고 버려서도 안 된다는 숙명적 사실을 깨우치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누가 이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함이 더 중요한 우리들의 자세라고 본다.

필자는 역사의 단편이지만 공신(功臣)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고려 시대에 공신의 종류는 많은 편이지만, 조선시대에도 28종이나 되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제일 잊히지 않는 임진왜란 시기 공신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 호종공신(扈從功臣),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으로 국가나 왕실에 특별한 공훈을 세운 신하들을 엄격히 심사하여 선정 표창했다.

선무공신 중 두각을 나타내는 분들로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등이다. 뒤를 이어 선무원종공신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표창했는데 전방삭 장군은 2등급 선두 그룹에 기록되었다.

전방삭의 조부는 진사로 후학을 가르쳐 유덕군자(有德君子)로 불렸고, 부친은 장흥 부사를 역임했다. 외아들로 태어난 전방삭은 체구가 장대하면서도 날렵하여 무예에 능숙한 솜씨를 보이더니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에 근무하게 되고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오르게 되었다. 이의 증거로 출생지인 보성군 미력면 반룡리 반암마을 유래로 ‘인왕전씨(人王全 氏. 이 지역을 떠난 지 약 300년 후 기록으로 이름을 잊은 것 같다)가 벼슬을 하여 솟대를 마을 입구에 세우고 축하했는데 이곳을 지금도 솟대미(소간미:嘯竿郿) 라고 부른다’라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3일부터 1592년 5월 9일 이순신 막하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록은 찾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근무를 도운 증거로는 이순신 장군 사액사당(賜額祠堂) 제1호인 여수 충민사 경내에 세워진「선조임진전라좌수영이충무공진충제공추모비」(宣祖壬辰全羅左水營李忠武公管下盡忠諸公追慕) 선단에 기록되었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서는 이순신과 전방삭은 동순절자(同殉節者)로 기록하고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순신이 방진(方震) 보성군수의 외동딸 방태평(方太平)과 결혼하여 보성에 머무를 때 이순신과 전방삭은 동갑내기로 친구가 되었다는 구전으로 보아, 전라좌수영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명으로 이순신 장군이 하옥되자 전방삭 장군은 백방으로 구명 운동을 하였으나, 여의찮아 병영을 떠나 고향인 보성으로 귀향하여 보성군수와 지역 유지분들을 찾아뵙고 의병을 창의할 것을 알린 뒤 자택에 들러 군량미로 50석을 내놓으니, 이를 본 유지분과 친척들이 잡곡을 합하여 100석을 헌납하였다.

전쟁 중이어서 고을 청장년들은 이미 입대하거나 전사한 자 많아 의병 모집에 애로를 느꼈다. 겨우 의병 300명을 확보하여 미리 군 요새지로 보아두었던 보성군 벌교읍 영등 골짜기(후일 이곳에서 의병 훈련을 하여 난국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세평골(世平㐣)이라 불림)에 진지를 마련하였다. 과거 훈련원 습독관(習讀官)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정예병으로 길렀으므로 타의 의병부대보다는 월등한 무술 실력을 갖춘 의병대가 되었다.

후일 지방으로 침투한 왜적을 8회에 걸쳐 섬멸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보고 어느 역사학자가 말하기를 지방의 의병장으로는 ‘꽤 많은 전투를 했군요’ 했다. 이는 당시 여러 의병 활동 중 자랑할만한 성과였다. 또 어느 대학 교수는「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이란 서적을 접한 뒤 ‘우리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분의 공적만 교육했지, 숨어있는 애국 충신을 발굴해 내지 못한 점이 심히 부끄럽다’라고 했다.

전방삭 장군은 의병 활동에 필요한 모든 병기와 군량미의 경비로 사유 재산을 충당했기에 후손에게는 쌀 한 톨 없는 찌든 가나만을 남겨주었다. 후손은 우선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여, 글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해 문맹자가 되고 말았다. 이런 한은 누가 치유해 줄 것인가?

그런가 하면 아들 전홍례( 全弘禮)는 훈련원 판관 시절 병자호란을 맞아 인조 임금을 강도(지금의 강화도)로 모시다 순절하였으니 부자 충신이 탄생했다고 칭찬은 받았으나 가문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오직 남는 것은, 명예뿐이나 그나마도 챙겨줄 이 없었으니 이 한을 어찌하면 좋겠는지. 위정자들과 관심 없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자들께 묻고 싶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있다고 감은 입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직접 따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당사자의 활동이 절대 필요한 세상이다.

필자는 능력이 없는 촌노이다. 전방삭 장군과 같이 싸운 장수의 후손들이 노력하여 기념관을 건립하는 현장을 보았다. 이를 거울삼아, 전방삭 장군도 충분한 자격이 된다고 판단하여 있는 힘을 다해보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그 열기로 18년간이나 군청을 드나들었더니, 이젠 그만 오라고 한다. 너무 귀찮게 굴었나 보다.

앞 회에서 말씀드린 데로 전방삭 장군의 유품은 일본 순사들에게 다 빼앗기고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장군의 자료를 백방으로 수집하여 부족하지만, 5권의 책을 손수 발간하여 배포했다.

군청의 도움으로 전방삭 장군 일대기「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이란 제목으로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노기욱 박사가 집필하여 발간하고, 전방삭 장군 역사소설 「꽃이 지니 열매 맺혔어라.」란 제목으로 정현남 작가가 집필하여 발간하였다.

그 뒤 전방삭 장군의 업적을 고증하기 위해 역사학을 전공한 교수들과 세미나를 개최했다. 여기까지 절차를 밟는 데만 18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이런 고증을 거쳐, 도와 군에서 공적에 걸맞은 기념관 건립 사업이 확정되어 하늘을 나는 듯 기쁘다. 이제는 그동안 가난과 무지의 고통으로 쌓인 한이 풀리는듯하여 한편 홀가분하다.

지금까지 필자의 원고가 졸필이지만 격려하고 도와주신 <한겨레:온>에 다시 감사 말씀을 올리고,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후일 전방삭 장군에 대한 좋은 소식이 있을 때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전종실 주주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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