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열어보니 대구에서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는 제자 현송(玄松, 정영목 원장)의 카톡이다. 백로 사진과 함께 다음의 글을 보냈다.

"교수님, 매일 아침, 점심 식사 후 한의원 인근 신천변 고수부지길 산책하며 찍은 사진입니다. ~~~ ^^^"

사진을 보니 개천 한가운데 돌 위에 앉아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해오라기(백로 류)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문득 며칠 전 죽전 동생 집에 갔을 때 본 벽에 걸린 아우 석천(石泉, 정우권)의 작품 성삼문의 시가 생각났다.

바로 제자에게

"우와~ 현송, 한 폭의 수묵화네! 이 사진을 보니 문득 성삼문의 수묵화로 그린 백로 그림에 쓴 화제시 생각나네" 했다.

雪作羽衣玉作趾
窺魚蘆渚幾多時
偶然飛過山陰縣
誤落羲之洗硯池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다리 만들어
늪가에서 고기 엿본 지 얼마이런고.
우연히 하늘을 날아 산음현 지나가다
잘못해 왕희지 벼루 씻는 못(池)에 빠졌네. (어떤 곳엔 '羽衣'를 '衣裳'으로 했음)

현송, 이 시는 조선시대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成三問, 1415-1456)의 시로 알려져 있네.

성삼문이 명나라에 갔을 때, 어떤 문신이 성삼문이 시문(詩文)에 능하다는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백로 그림에 넣을 화제(畵題)를 지어달라고 해서 건성으로 읊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雪作衣裳玉作趾
갈대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라 하였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림을 내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백로 그림이었네.

이에 아래 구절을 채워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縣, 잘못하여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에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하고 그자리에서 붓을 들어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하네. (패관잡기/稗官雜記)

잘못해 왕희지가 벼루를 씻던 물에 떨어졌다. 誤落羲之洗硯! 현송, 얼마나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인가!

자네도 익히 알고 있지만 왕희지(王羲之, 307-365)는 동진(東晉) 시대의 명필로 중국 회계산(會稽山) 북쪽 산음현(山陰縣)에서 벼슬살이할 때 '난정'(蘭亭)이라는 곳에서 선비들을 모아 함께 글을 짓곤 했네.

그 당시의 글들을 모은 것이 <난정집서>(蘭亭集序) 인데, 왕희지는 그 책의 서문을 써서 유명해졌네.

성삼문은 족자 그림 속의 백로(학)가 하늘을 날아올라 멀고 먼 산음현, 그것도 왕희지가 살던 아주 오래전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벼루 씻던 못(池)에 빠뜨렸네. 대단한 비약이 아닐 수 없네.

사실 난 <패관잡기>를 읽기 전엔 "偶然飛過山陰縣, 誤落羲之洗硯池"를 백로가 먹물에 빠져 깃털이 까맣게 됐다고 생각했네. 몸이 희면서도 일부 검은색을 띤 애오라지도 있으니까. 이것 또한 나의 상상력이었네. ㅎㅎㅎ ~~~^^^

헌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네. 그건 바로 수묵화로 그려진 족자속의 백로를 말한 것일세. 즉 "어찌하여 수묵으로 이렇게 까맣게 그려졌느냐?"는 말일세. 대단한 비약이네.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일세.

어쩌면 족자의 그림은 성삼문의 이 화제시로 인하여 비로소 살아 있는 한 마리의 학이 되었을지도 모르이.

가히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경지가 아닐 수 없네. ㅎㅎㅎ

현송, 고맙네!

2023.1.21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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