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목요일.

새해 들어 '동우회' 첫 탐방 날이다. 이번 탐방은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을 찾기로 했다.

오후 1시,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만난 우리는 자하문 쪽을 향해 걸었다. 약 400m를 가다 보니 왼쪽 골목에 '湧金屋'(용금옥)이란 간판이 보인다. 바로 경산(駉山, 홍형기 회장)이 오늘 점심 장소로 예약한 곳이다.

湧金屋(용금옥)
湧金屋(용금옥)

옥호(屋號)가 특이하다. 물 솟아오를 용(湧)자에 쇠금(金), 금이 샘물처럼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들어가 보니 한옥 주택을 리모델링해 개조한 추어탕 전문 식당이다.

우리가 학창시절엔 장안의 추어탕 하면 신설동의 곰보추어탕, 형제추어탕이 유명해 그곳을 자주 찾았는데, 오늘 여기 와보니 이집은 1932년에 영업을 시작한 오랜 전통의 추어탕 전문집이다. 원래는 중구에 있는 용금정과 한 뿌리를 두었으나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안내판을 보니 "한국의 대표적 보양식인 추어탕을 사시사철 제공하는 이곳에선 서울식 통추어탕과 삶은 미꾸라지를 갈아 넣은 남도식 추어탕을 함께 선보인다" 했다.

"우리 어떤 걸 주문할까?"

경산의 말에 용연이 "서울식 통추어탕!" 했다.

용연(龍然, 정용택)의 말에 모두 그렇게 하자고 했다.

용연이 서울 통추어탕을 주문한 것은 오랜만에 서울 추어탕을 맛보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사실 용연이는 부모님께서 50년대 창신동에서 추어탕 식당을 경영했기 때문에 그때 자기 집의 추어탕 맛과 무엇이 다른가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일지 모른다.

"역시 그 맛이네!"

용연은 옛 부모님을 생각하며 한 그릇을 뚝딱 깨끗이 비웠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모두들 오랜만에 서울식 추어탕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 앞을 보니 벽에 글씨인 듯 그림인 듯한 족자 하나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한글 '서'자를 산(山)으로, '울'자를 강물(水)로 상형화한 '서울'이란 한 폭의 글씨 그림(書畵)이다.

다시 왼쪽을 보니 옆에 "北岳無心五千年, 漢水有情七百里"라 쓴 한시(漢詩)가 적혀 있고, 그 밑에 '牛耳'란 낙관이 찍혀 있다. 북악(北岳)은 5천 년 동안 무심하고, 한수(漢水)는 유정하게 7백 리를 흐른다는 뜻이다.

서영복 교수의 '서울' 서화
서영복 교수의 '서울' 서화
처음처럼
처음처럼

'牛耳'는 '쇠귀'란 뜻으로 '처음처럼'을 쓴 신영복(申榮福, 1941-2016)의 아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신영복 교수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마 한양천도기념으로 쓴듯하다. 이 시에서 북악과 한수, 무심과 유정, 5천 년과 7백 리가 대구(對句)가 된다.

그는 자기 저서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에서 북악은 왕조 권력을,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상징해 썼다고 술회했다.

왕조권력은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느라 백성들의 애환에 무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강물은 민족의 애환을 보고 유정하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요즘 3.8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신영복을 좋아한다" 했다고 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오늘 뜻밖에 이 용금옥에서 신용복을 만났다.

점심을 마친 뒤 우린 오늘의 목적지 국립민속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거리를...

"우사, 저기 흰 눈 덮인 인왕산 한 컷 담게!"

경복궁 쪽에서 바라본 흰 눈 덮인 인왕산
경복궁 쪽에서 바라본 흰 눈 덮인 인왕산

내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인왕산도>(仁王山圖)를 떠올리며 우사에게 말했다. '카톡!' 바로 우사의 인왕산 설경 사진이 왔다.

푸른 소나무 사이로 흰 눈에 덮인 인왕산이 깊은 잠에 빠진듯하다. 난 그 사진에 바로 "蒼松隔遠仁王山, 白雪衾蓋沈睡眠"이라 제시(題詩)를 지어 보냈다. 푸른 소나무 사이로 저 멀리 인왕산, 흰 눈 이불 덮고 깊은 잠에 빠졌네.

여기 '인왕산'을 '仁旺山'이라 왕성할 왕(旺)자를 쓰지 않고 임금 왕(王)자를 썼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인왕산을 임금 왕(王)자를 써 '仁王山'이라 했는데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조선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王'을 '旺'으로 바꾸어 '仁旺山'이라 표기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도 인왕산을 '仁旺山'이라 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눈은 여전히 내린다.
눈 내리는 경복궁!
우린 눈을 밟으며 민속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박물관 앞에 이르러 다시 눈덮인 인왕산을 바라보며 쇠귀(牛耳)의 '서울'(北岳無心五千年, 漢水有情七百里)을 떠올리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2023. 2. 14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쓰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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