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수요일

아침 7시 서울을 떠나 부여에 온 우리는 국립 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고 서둘러 무량사로 향했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만수산의 무량사는 부여가 내세우는 가장 아름다운 명찰로 통일 신라 문성왕 때 법일 국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조선 인조 때 진묵대사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한다.

이 절의 주불(主佛)은 아미타불인데 아미타(阿彌陀)란 산스크리트(sanskrit)의 아미타유스(무수한 수명을 가짐),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한문으로 阿彌陀(아미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 의역하였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지혜, 헤아릴 수 없는 목숨이 있는 곳을 극락이라 한다. 따라서 이 절 이름을 無量寺(무량사)라 하였고,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을 極樂殿(극락전), 주불은 아미타불로 모셨다.

무량사 일주문
무량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기둥 하나로 떠받쳐진 우산 모양의 정자를 불안한 듯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 천왕문 쪽으로 가니 맞은편 무진암으로 가는 길목에 하나의 사리탑이 보였다.

이 사리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쓰고, 생육신 중 한 분이신 매월당 김시습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매월당 김시습 사리탑(앞 까만 비석에 '五歲 金時習'이란 글씨가 있다)
매월당 김시습 사리탑(앞 까만 비석에 '五歲 金時習'이란 글씨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사리탑 앞에 까만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五歲 金時習'이라 쓰여 있고 다시 위쪽으로 가니 '梅月堂金時習詩碑'가 있다. '五歲 金時習', 난 오세란 글을 보며 "이런 호도 있나?"하고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이 '五歲'가 매월당 어렸을 때 별호란 것을 알았다.

김시습은 3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 한다. 세종대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승지 박이창에게 알아보라 했다. 승지는 강가에 작은 정자가 있고 그 밑에 빈 배가 매어져 있는 그림을 보이며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겠느냐? 물으며 승지가

"小亭舟宅何人在(작은 정자와 배 안에 누가 있는가?)“

이때 5살짜리 김시습이 "來時襁褓金時習"하고 즉석에서 대답했다 한다. 올 때 강보(포대기)에 싸여온 김시습이란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세종대왕이 비단 도포를 선물하며 성장하면 크게 쓰리라 했다 한다. 이로부터 김시습에게 '五歲'란 별호가 주어졌다 한다.

매월당 김시습시비
매월당 김시습시비

다시 시비를 보니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半輪新月上林梢
山寺昏鐘第一鼓
淸影漸移風露下
一庭凉氣透窓凹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 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야금야금 찬 이슬에 젖는데,
뜨락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정한모(鄭漢模) 선생이 번역하고 김충현(金忠顯) 선생이 썼다. 이 시는 매월당의 '가을밤에 달을 보며(中秋夜新月)‘ 두 수(二首) 중 하나다. 다른 한 수는 아래와 같다.

白露溥溥秋月娟
夜蟲唧唧近床前
如何憾我閒田地
起讀九辯詞一篇

맑은 이슬 맺히고 가을 달빛 고운데,
밤벌레 우는 소리 침상 앞까지 들려오네.
어쩌자고 한가로운 마음을 흔들어 놓는가!
자려다 말고 일어나 구변 한편 읽어보네.

오랜만에 오늘 여기 무량사 와서 매월당 시를 다시 읽었다. 시비 글씨를 쓰신 김충현 선생님은 내 고등학교(서울 경동) 때 은사 선생님이시다. 오늘 선생님을 여기와 뵙다니...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水流任急境常靜
花落雖頻意自閑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 못 바닥 뚫어도 물에 흔적 없거니,
물 급히 흘러도 경계 항상 고요하고,
꽃 져서 번잡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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