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에서 만난 지공·나옹·무학·석가여래 사리탑

2020년 5월에 양주 회암사를 다녀오고 쓴 글에도 나오지만, 현재 터만 남은 회암사는 조선시대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최대 3,00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만 1만여 평이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절을 누가 창건했을까?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 3인방이 이 절을 창건하고 일으켰다는 설이 대세다.

고려 후기 1328년,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  대규모 사찰을 건립했다. 이후  고려 승려 나옹(懶翁)이 중건했다. 무학대사는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제자다. 무학은 이성계의 스승으로, 1392년 개국 조선의 왕사(王師)로 임명되었고, 회암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회암사는 왕실 사찰로 승격되었다.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회암사에 와 있었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 회암사는 불행하게도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타 지금은 자리만 남아있다.

천보산 자락 아래 지공·나옹·무학대사의 사리탑(부도)이 있다. 세 스님의 사리탑과 석등과 탑비는 1821년 유생에 의해 훼손되었으나 1828년 순조가 다시 세우면서 회암사 옛터 옆에 작은 절 회암사까지 지었다. 이 새 회암사 오른쪽에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가 조용히 숨 쉬고 있다.

1326년부터 3년간 지공선사는 고려에 머물면서 1328년 회암사를 창건했다. 지공선사에게 회암사는 가장 중요한 사찰이었다. 사후 1372년 회암사에 지공선사의 사리탑과 석등이 세워졌다.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공선사의 사리탑과 석등
지공선사의 사리탑과 석등

지공선사 사리탑은 높이 3.65m다. 팔각지대석 위에 받침돌(기단/基壇)은 3개다. 3개의 받침돌 형태가 다 다르다. 받침돌 위 탑의 몸통인 몸돌(탑신/塔身)은 전체적으로 둥글면서 넓적한 모양이라 유난히 짧아 보인다. 몸돌 위 지붕돌(옥개석)은 팔각이다. 석탑 꼭대기인 상륜부의 받침돌은 팔각이고, 그 위에 3단의 둥근 보륜과 보주가 있다.

석등은 4각형 기본 모양이다.  4각 위·가운데·아래받침돌 위에
화사석(火舍石 / 석등에서 등불을 밝히도록 만든 부분)이 있고 화창이 앞과 뒤로 두 개 있다.  화사석 위 4각 지붕돌이 있고, 지붕돌 위에는 연꽃 봉오리가 장식되어 있다. 

지공선사 부도비
지공선사 탑비
지공선사 탑비와 귀부
지공선사 탑비와 귀부

지공선사의 유래를 기록한 이 탑비는 사리탑, 석등과 함께 1378년(고려 우왕 4년)에 세워졌으나, 1821년  훼손되어 1828년에 중건되었다. 이 탑비 옆에 귀부(龜趺)가 있다. 귀부는 원래  비석 받침으로 세워지는데, 이 귀부는 훼손되기 전 탑비 받침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이 탑비는 200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나옹선사의 사리탑와 석등 
나옹선사의 사리탑와 석등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는 고려후기 뛰어난 고승으로 공민왕의 스승이다. 1347년 중국 원나라에서 지공선사를 만나 제자가 된 후 1358년 고려에서 다시 지공을 만났다.  나옹선사의 사리탑과 석등 역시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 

나옹선사는 사실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다. 이 '청산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유명한 '청산가'가 바로 나옹선사의 선시다.

나옹선사 사리탑과 석등
나옹선사 사리탑과 석등

나옹선사 사리탑은 높이가 약 3.5m다. 팔각지대석 위에 3개 받침돌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둥근형이다. 몸돌은 둥글고 짧다. 8각 지붕돌은 크고 높다. 상륜부의 보륜은 둥글고 4단이다. 그 위에 보주를 얹었다. 가운데받침돌과 몸돌이 둥근 모양은 고려 후기 처음 나타났으며 조선 전기에 새로운 사리탑 형식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나옹선사의 석등도 지공선사의 석등과 거의 비슷한 4각형 기본 모양이다.  3개 받침돌 위에 화사석이 있고 화창 역시 앞과 뒤 두 개다.  화사석 위 4각 지붕돌이 있고, 지붕돌 위에는 사리탑과 같은 모양의 봉오리가 얹혀 있다.

고려 후기~ 조선 전기에 살았던 무학대사(1327∼1405) 사리탑이다. 1397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위해 회암사 북쪽에 미리 사리탑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후 1405년 무학이 입적하자 1407년 사리를 안치했다 한다. 이 탑은 조선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탑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무학대사 탑
무학대사 탑

높이 2.7m의 무학대사 탑은 위 두 사리탑과 다르다. 길고 큰 돌로 된 2단의 팔각지대석 위에 특이한 돌기둥이 있다. 돌기둥은 지대석 모서리에 8개 세워졌다. 돌기둥 꼭대기는 보주(寶珠) 모양으로 장식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 하단에는 길고 넓은 돌을 끼워 넣었고, 상단에는 기둥을 연결하는 난간을 둘렀다. 

3단의 받침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보면 돌기둥 안에 숨어있는 받침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보물이라 그런지 가까이 가서 볼 수 없게 철담을 둘렀다. 하지만 얼핏 보아도 받침돌은 범상치 않다. 받침돌은 련(覆蓮)과 꽃모양이 조각된 아래받침돌, 꽃무늬가 조각된 가운데받침돌, 앙련(仰蓮)과 당초문(唐草文 덩굴무늬)이 조각된 위받침돌로 되어 있다고 한다. 살짝 보이는 위받침돌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이 간다.

위받침돌과 몸돌과 지붕돌과 보주
위받침돌과 몸돌과 지붕돌과 보주

몸돌은 둥근 형태로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용무늬가 구름무늬와 함께 조각되어 있다. 엄청 역동적인 운룡이다. 지붕돌도 아름답다. 각 모서리에 추녀가 있고, 추녀마루 위에 용두, 봉황두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짧고 단순하다. 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 위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꼭대기에 있다. 

쌍사자 석등
쌍사자 석등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이 석등은 14세기 말인 조선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5m로  사각지대석 위에 아래받침돌이 붙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복련(覆蓮)이 조각되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쌍사자 모양이다. 가슴과 배는 붙인 채 고개를 쳐들고 턱으로 상층부를 받치고 있는 사자가 힘겨워 보인다. 위받침돌에는 앙화(仰花)가 조각되었다.

화사석은 가운데를 둥그렇게 판 돌 2개를 좌우에 붙여 놓았다. 가운데 둥근 곳이 화창 역할을 한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반원을 그리면서 들렸고 꼭대기에는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보륜과 보주(寶珠)가 있다.

무학대사 사후 그의 행적을 담은 탑비로 태종 10년 1410년 건립되었다.

낮은 지대석 위에 모서리를 둥글게 한 높은 사각 받침돌을 놓고 223cm의 비석을 세웠다. 이 역시 1821년 훼손되어 1828년 다시 세워졌다. 오른쪽에는 최초 비석에 사용되었던 사각 받침석이 있다.  

불에 타버린 거대한 사찰터 회암사지에 5.89m로 유난히 키가 큰 사리탑이 하나 있다.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사리탑은 회암사지 동북쪽 끝자락에 조용히 서 있다.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1년 보물로 승격될 정도로 아름다운 기품이 느껴지는 탑이다. 

회암사지 사리탑
회암사지 사리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64년(세조 10) 4월에 효령대군이 회암사 동쪽 언덕에 석종(石鐘)을 건립하고 석가여래 사리를 안치하며, 법회를 열어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이날 저녁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수백 개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서 석종은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으로 많은 학자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던 탑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층의 받침돌  조각
다층의 받침돌  조각

팔각지대석 위에 받침돌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부 팔각 형태다. 아래받침돌은 2장의 꽃잎이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覆蓮)의 연꽃무늬 16개가 조각되어 있다. 아래받침돌 옆면에는 기린, 용 등이 구름에 휩싸여 달리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2층이다. 1층은 각 8면에 모양이 다른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 2층 밑면에는 3단으로 각이 졌다. 옆면에는  덩굴무늬를 새겼고, 윗면에는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무늬를 새겼다. 위받침돌도 2층이다. 1층에는 8부신장(八部神將)이 천의(天衣)를 휘날리고 있고, 2층은 덩굴무늬로 장식한 후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

위받침돌과 둥근 몸돌 사이에는 별도의 3단 받침돌을 두었다. 둥근 몸돌은 다층 받침돌에 비하면 작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해 상륜부까지 첨탑처럼 보인다. 연꽃무늬가 장식된 받침대 위에  여러 단의 원형 보륜이 포개져 있고 맨 꼭대기에 보주를 올려 마무리했다. 

회암사지 사리탑
회암사지 사리탑

멀리서 보면 더 완전한 예술품으로 보인다.  용, 기린, 8부신장 등 뛰어난 조각 장식으로 아름다움을 더했고, 다층 받침돌을 놓아 안정적이면서 매끈한 사리탑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사리탑과 다른, 새로운 사리탑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아름다운 조각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회암사지 사리탑에서 아래빋침돌 기린 무늬 조각
회암사지 사리탑에서 아래빋침돌 기린 무늬 조각

 

회암사지 사리탑에서 아래빋침돌 용 무늬 조각
회암사지 사리탑에서 아래빋침돌 용 무늬 조각

고려시대 가장 아름다운 사리탑은 원주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탑이라고 한다. 일제 침탈과 한국전쟁에 만신창이가 되어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복원과정을 거쳐 지난 8월 1일 법천사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언제 시간 내어 국보 사리탑을 보러  원주에 가야겠다. 

1911년 원주 법천사 터에서 뜯겨 서울 명동성당 부근의 일본인 병원 경내로 옮겨진 지광국사탑. 가장 오래된 탑 사진이다. 절터에 탑이 자리했을 때의 사진은 전하지 않는다.(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1911년 원주 법천사 터에서 뜯겨 서울 명동성당 부근의 일본인 병원 경내로 옮겨진 지광국사탑. 가장 오래된 탑 사진이다. 절터에 탑이 자리했을 때의 사진은 전하지 않는다.(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참고 사이트 : 지공선사사리탑 및 석등 - Daum 백과 / 나옹선사 사리탑 및 석등 - Daum 백과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Daum 백과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 Daum 백과 /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楊州 檜巖寺址 舍利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참고기사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나옹선사는 / 5년간 대수술 받은 지광국사탑 제모습 찾았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