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 왕국

카파도키아를 구글에서 찾으면 나오지 않는다. 현 지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지배 때 붙여진 지명이다. 카파도키아는 ‘명마의 나라’란 뜻이라 한다. 명마들이 많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카파도키아 지형이 멀리서 볼 때 흰 명마들이 달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Cappadocia는 페르시아어 'Katpatuca'에서 나왔다는데, Katpatuca의 뜻은 '낮은  땅'이라고 하니..... 헷갈린다.  

기원전 90년경 로마의 동맹국인 카파도키아 왕국(출처 : https://namu.wiki/w/%EC%B9%B4%ED%8C%8C%EB%8F%84%ED%82%A4%EC%95%84%20%EC%99%95%EA%B5%AD)
기원전 90년경 로마의 동맹국인 카파도키아 왕국(출처 : https://namu.wiki/w/%EC%B9%B4%ED%8C%8C%EB%8F%84%ED%82%A4%EC%95%84%20%EC%99%95%EA%B5%AD)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망 후,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 피를 물려받은 아리아라테스 1세가 카파도키아 왕국을 세웠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마케도니아, 폰투, 로마와 싸웠다. 중간중간 왕권을 빼앗겼다가 되찾기도 하면서, 강대국 파르티아와 로마의 완충 지대에서 노련한 외교술로 350년간 명맥을 유지했으나, 결국 서기 17년 로마에 의해 패망했다. 카파도키아는 콤마게네처럼 페르시아와 그리스 문명을 받아들여 녹아낸 복합 문명을 가진 국가다. 왕국의 수도는 마차카(Mazaka)로 현재 튀르키예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카이세리’다. 카이세리는 카파도키아 관광 기점인 괴레메와는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현재 카파도키아라 부르는 지역
현재 카파도키아라 부르는 지역

원래 카파도키아 왕국은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함하지만, 현재는 네브셰히르(Nevşehir)를 가운데 두고 동쪽으로는 카이세리(Kayseri), 서쪽으로는 악사라이(Aksaray), 남쪽으로는 니데(Niğde), 북쪽으로는 키르셰히르(Kırşehir) 지역을 말한다. 관광지로서 카파도키아는 우치히사르, 괴레메, 아바노스, 위르굽, 카아막르, 데린쿠유, 으흘라라와 그 주변 지역을 말한다

관광지로서 카파도키아
관광지로서 카파도키아

괴레메 국립역사공원(Göreme National Park and the Rock Sites of Cappadocia)

괴레메란 뜻은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지하에서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괴레메는 네브셰히르(Nevşehir) 중심부 도시로, 호텔, 레스토랑 등이 모여있는 카파도키아 관광의 거점이다. 괴레메는 괴레메 계곡을 포함한 자연이 특이하게 아름답고, 바위를 파고 만든 수도원, 교회, 집, 지하 도시 등 문화유적이 많다. 하여 유네스코에서는 1985년 괴레메 국립역사공원을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동시에 충족한다고 하여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총 40㎢ 크기의 규모로. 2개의 지하 마을, 5개의 암굴 마을 및 200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갈색 영역이 Göreme National Park and the Rock Sites of Cappadocia
갈색 영역이 Göreme National Park and the Rock Sites of Cappadocia

카파도키아 암굴 마을

암굴 마을은 전쟁을 피해, 혹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암굴이나 땅굴을 파고 살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동로마 시대에는 수도자들이 돌을 파고 깎아 수도원과 교회를 만들면서 암굴 마을이 확장되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이런 암굴 마을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이런 암굴 마을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오르타히사르 성채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오르타히사르(Ortahisar) 성채는 이름 그대로 카파도키아 시내 중앙에 우뚝 자리하고 있다. 높이 90m로 카파도키아 지역 전체에서 가장 큰 요정의 굴뚝이다. 이 성채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히타이트 시대에 초기 건물의 기초가 세워졌고 이후 로마 시대까지 전쟁 중에 견고한 성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로마 시대에는 카파도키아의 3대 요새 중 하나였다. 위르귀프(주 요새)과 오르타히사르(가운데 요새), 우치히사르(가장자리 요새)가 그 3대 요새다. 오르타히사르와 우치히사르는 지하로 서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고 한다. 

동로마 시대의 3대 요새
동로마 시대의 3대 요새

오르타히사르는 전략적으로만 사용한 성채는 아니다. 정착용 주거지로도 사용되었다. 10층 규모의 최초 아파트형 암굴이라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었다. 내부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곳곳에 집들이 있다. 성채의 중턱에는 독특한 양식을 한 암굴집이 빼곡히 들어서있다. 성채 주변 거의 모든 경사지에는 땅을 파서 만든 저온 보관창고가 있었다. 감자, 사과, 오렌지, 레몬 등을 저장했다. 오르타히사르 계곡에는 수도원, 교회들도 많다. 

오르타히사르 성채
오르타히사르 성채
오르타히사르 성채
오르타히사르 성채

Pancarlık Church(판잘리크 교회 )

카파도키아 최초의 수도 활동은 4세기경 동로마 시대 때 시작되었다. 4세기경 카이세리(Kayseri)는 이 지역 종교 중심지였다. 카이세리 주교인 성 바실리오의 세계관을 따르던 작은 공동체들이 응회암 바위 지형인 괴레메를 알게 되어 이주하였다. 수도사들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와서 바위를 깎아 은둔형 수도원을 짓고 수도 생활을 하면서 교회도 지었다. 당시 최대 약 3,000개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교회 벽면과 천장에는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에는 유명한 수도원과 교회가 많아 관광객이 많다. 우리는 아주 한적한 판잘리크 교회를 방문했다. 이 교회는 오르타히사르 성채 남쪽 판잘리크 계곡에 있다. 

판잘리크 교회 입구
떠나기 전 멀리서 찍은 교회. 터키 사람들은 터키 국기를 사랑하는 것 같다. 자주 볼 수 있다. 
떠나기 전 멀리서 찍은 교회. 터키 사람들은 터키 국기를 사랑하는 것 같다. 자주 볼 수 있다. 

'판잘리크'란 말은 튀르키예어로 '사탕무(비트) 정원'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주변이 사탕무를 기르던 곳이 아닐까 싶다. 이 교회는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다. 서기 500년 경 굴을 파고 지었다. 이후 회반죽을 바르고, 프레스코화도, 본당도 만들고, 성상도 만들고, 물결 모양의 계단도 만들었다. 1920년대까지 기독교인들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1923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파괴되었다. 돌로 된 성상은 완전 파손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고, 아래 쪽 프레스코화는 지워졌다. 1990년 관광지가 되면서 파괴에서 벗어났지만 복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천장에 남아있는 프레스코화
천장에 남아있는 프레스코화

예수의 생애를 담은 29점의 프레스코화가 천장과 벽면에 그려져 있다. 11세기 전반 한 화가가 녹색과 붉은색 안료를 주로 사용하여 그렸다. 색이 변하지 않고 1000년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은 비둘기알에 있다. 안료에 노른자를 섞어 칠한 후 흰자로 코팅하면 변색하지 않고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벽면 위쪽에 남아있는 프레스코화  
벽면 위쪽에 남아있는 프레스코화  

여기는 뭘까? 본당이 두 개 있다는데 여긴 본당이라기보다는 성체조배실 같다. 천장과 벽면이 특이하다. 가이드 말로는 아래 돌을 만지면서 기도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만져서 돌이 닳았다고 한다. 나도 무릎 꿇고 손을 얹어 짧은 기도를 했다. 순간이었지만 뭔지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마음속을 지나갔다. 

교회 옆 계곡 서쪽 경사면에도 암굴 집이 있다. 이 집과 주변 계곡을 자세히 보면 바위 층층 색이 다르다. 한 개의 바위에서 분홍과 녹색, 흰색, 갈색, 회색이 보인다. 꼭 무지개떡 같다. 왜 그런지 알면서도 보면  또 감탄이 나오고 신기하다. 그런데 늘 궁금한 점이 있다. 암굴 집 화장실은 어디 있지? 특수 용기에 용변을 보고 모았다가 밖에 내다 버리나?

교회 옆 암굴 집 
교회 옆 암굴 집 

판잘리크 계곡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반할 수밖에 없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잠시 그 안에 작은 한 점이 되고 싶었다. 걷다 보면 예상 밖의 암굴 집에 들어가 볼 수 있을 텐데... 기기묘묘한 바위도 만져보는 재미도 있을 텐데.... 아쉽게도 단체 여행은 무계획의 득템 기회를 기대할 수 없는 여행이다. 그저 호루라기 소리에 끌려가듯 따라가야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니 군말 없이 감수할 수밖에.... 그래도 내일 로즈 밸리 트레킹이 있으니까.... 

내가 걷고 싶었던 판잘리크 계곡. 떠나기 싫어서 자꾸 사진만.... 
내가 걷고 싶었던 판잘리크 계곡. 떠나기 싫어서 자꾸 사진만.... 

우치히사르 성채

'뾰쪽한 바위'라는 뜻의 우치히사르(Uchysar) 성채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높은 언덕(해발 1,300m)에 있어서 괴레메의 랜드마크라 불린다. 기원전 3,000년 경 아시리아 상인들의 숙소로 쓰여졌다고 할 정도로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주거지이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동로마 시대에는 교회와 요새로 사용했고, 셀주크 튀르크 때는 요새로 사용했다. 우치히사르 성채 정상은 이 지역의 전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피난과 방어를 목적으로 인근 지역까지 길게 터널이 연결되었다.

우치히사르 성채
우치히사르 성채

성안에는 수많은 방이 있고 계단과 터널,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방의 입구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미닫이 돌문이 있어서 피신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츠히사르 성을 중심으로 수백 채의 암굴 집이 있다. 우치히사르 성의 동쪽, 서쪽, 북쪽의 일부 버섯바위들은 로마 시대에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파헤쳐졌다고 한다.

오르타히사르와 우치히사르 두 성채 다 멀리서만 구경했다. 한마디로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비둘기 계곡의 암굴 마을과 비둘기 집
비둘기 계곡의 암굴 마을과 비둘기 집

비둘기 계곡(Güvercinlik Vadisi)

우치히사르 바로 아래에 비둘기 계곡이 있다. 비둘기 계곡은 사람이 부드러운 응회암을 깎아 만든 수천 개의 비둘기 집으로 인해 그 이름이 붙여졌다. 고대부터 카파도키아 사람들은 비둘기를 많이 길렀다. 비둘기 똥은 비료로 활용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었다. 숨어 살던 시기에 비둘기를 날려 옆 마을과 소통하기도 했다. 비둘기는 카파도키아 사람들에게 삶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아직도 이 계곡에는 비둘기가 많이 산다고 하지만, 지금 비둘기는 더 이상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진 않는다. 비둘기 집은 여전히 지역 주민들이 관리하며 저장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간혹 사람이 살기도 한다고 한다. 

위는 비둘기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아래는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살던 집 
위는 비둘기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아래는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살던 집 

이번엔 비둘기 집에 들어가 보았다. 사다리가 없으면 위층에 오르기 무척 어렵다. 일행 중 한 젊은이가 암굴 집에 들어가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힘들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비둘기 계곡에도 요정의 굴뚝이 있다. 요정의 굴뚝은 카파도키아  어디나 있다. 오후 햇살을 받은 요정의 굴뚝이 황금 바위로 변했다.   
비둘기 계곡에도 요정의 굴뚝이 있다. 요정의 굴뚝은 카파도키아  어디나 있다. 오후 햇살을 받은 요정의 굴뚝이 황금 바위로 변했다.   

비둘기 계곡은 걸어가던지 비포장 울퉁불퉁 길을 지프 투어로 가야 한다. 우리를 태우러 6대의 SUV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4명씩 타라고 했다. 그새 친해진 사람들은 서로 짝을 지어 차에 탔다. 우리는 누구와 막 친한 척하면서 같이 타자고 하기도 어색해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대부분 일행이 다 타고 나서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맨 뒤에 남은 차에 탔다. 그 차에는 우리 외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리 둘은 아주 널널하고 마음 편하게 가게 되었다. 

우리를 맞이한 젊은 기사는 영어로 우리가 아주 운이 좋다고 했다. 자신은 지프 투어 운전을 5년 했는데.. 앞에 먼저 떠난 기사들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단다. 여기 사람들은 자기 자랑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러고는 노래를 틀어주었다. 이선희의 '인연'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 깜짝 놀랐다. 우리가 놀라는 것을 알았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란다. 한국 사람인 걸 아니까.. 서비스로 한국 노래를 틀어주는 건 그럴 수 있다 해도... '인연'은 연식이 좀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인데 하면서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다음 노래는 '나 항상 그대를'이었다. 그는 "돌아와 그대~~ 내게 돌아와. 나 항상 그대 생각뿐이야 워 어어~~" 가 나오자 곡에 맞춰 아주 신난다는 포즈를 취했다. 영어를 좀 하는 것 같아서 영어로 물었다. "이 노래 가사의 뜻을 아세요?" 그랬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대면서 한국말로 말하라 했다. 내가 한국말로 하자 그는 음성 번역기를 돌려 보더니 튀르키예어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번역된 한국말을 보여주었다. ''모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였다. 나는 한국말로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했는데 연인을 잊지 못 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가사'라고 설명했다. 그가 또 음성 번역기를 돌렸다. 내 설명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였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세상에…. 이렇게도 소통이 되는구나 싶어서.... 나는 아직도 음성 번역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못하는 영어로 끙끙대며 말하려고만 했는데... 내가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ㅎㅎㅎ

왼쪽부터 우치히사르 성채, 비둘기 계곡,  오르타히사르 성채,  판잘리크 교회
왼쪽부터 우치히사르 성채, 비둘기 계곡, 오르타히사르 성채,  판잘리크 교회

참고 사이트 : 다음백과, 위키백과, 나무 위키
참고 서적 : Cappadocia(저자 :Murat Gülyazz/ 출판사 : Digital Dünyası)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