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야의 미스터리 고대 사회 '차탈회위크(Çatalhöyük)'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파 ‘메블라나(Mevlana)’의 탄생지 콘야.

카파도키아에서 안탈리아로 넘어가면서 콘야(Konya)의 메블라나 박물관에 들렀다. 방문한 곳은 메블라나 박물관이었지만, 사실 가보고 싶었던 곳은 '차탈회위크(Çatalhöyük)'다. 

콘야와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의 위치
콘야와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의 위치

콘야의 미스터리 고대 사회 차탈회위크(Çatalhöyük)

콘야는 놀라운 지역이다. 제1편에 썼듯이 콘야에서 46km 떨어진 곳에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지가 있다. ‘차탈회위크’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기원전 4,000년 이후 문명인데, 여기는 훨씬 이전인 기원전 7,400~5,200년 경 유적이다.

괴베클리 테페(사진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A%B4%B4%EB%B2%A0%ED%81%B4%EB%A6%AC_%ED%85%8C%ED%8E%98#/media/%ED%8C%8C%EC%9D%BC:G%C3%B6bekli_Tepe,_Urfa.jpg)
괴베클리 테페(사진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A%B4%B4%EB%B2%A0%ED%81%B4%EB%A6%AC_%ED%85%8C%ED%8E%98#/media/%ED%8C%8C%EC%9D%BC:G%C3%B6bekli_Tepe,_Urfa.jpg)

튀르키예에는 이것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10,000~8,000년 유적도 있다. 아디야만 동남쪽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다.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던 신석기 초기에 거대한 3층 신전이 지어졌다. 5,000명이 공동체 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인류 최초 신전 거주지라고 한다. 기원전 8,000년경 도시는 고의로 묻혔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당시 수학적 원칙을 적용하여 정교한 측량과 기술로 사원을 지었다는 점에서, 그 존재와 목적이 모두 베일 속에 싸여 있는 믿기 어려운 유적이다. 2018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거석 문명에 관해  더 알고 싶으면  중동본색 1강(28~36분)을 보면 된다. 

차탈회위크의 규격화된 주택 유적(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3%87atalh%C3%B6y%C3%BCk_after_the_first_excavations_by_James_Mellaart_and_his_team..jpg)
차탈회위크의 규격화된 주택 유적(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3%87atalh%C3%B6y%C3%BCk_after_the_first_excavations_by_James_Mellaart_and_his_team..jpg)

콘야 바로 옆에 있는 '차탈회위크'는 인류 최초의 규격화된 다층 주택 거주지다. 이 역시 신석기 시대에 8,000여 명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는 중동본색 1강(38~41분)에서 차탈회위크 현장을 30년간 지켜온 영국고고학자 이안 호더(Ian Hodder)의 말을 인용해 차탈회위크가 어떤 사회인지 말해준다.

“완벽한 고대 평등사회로 남북을 가르는 작은 개천을 경계로 통혼이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방의 규격이 동일하고 공회당이나 행정관서 등 권위적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위계질서나 계층 분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도시 공동체 운영은 만장일치협의체였을 것이고, 공동노동으로 남녀 차이 없이 노동 강도도 비슷했다. 공동육아 체제로 아이를 길렀고, 어떤 곳에서도 폭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30여년간 조사해온 영국의 고고학자 이언 호더가 주거 터에 직접 내려가 유적 세부를 설명하고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기원전 7500~5700년이라 하면 후기 구석기 시대가 막 지난 때인데... 수렵, 어로와 채취의 약육강식 생활에서 막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한 때인데....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조화롭게 진화한 사회가, 한 지역에서 2,000여 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인간의 본능인 이기심, 소유욕, 권력욕을 초탈한 삶의 철학을 가진 공동체가 고대에 존재할 수 있었다니 이 또한 미스터리다. 8,000년 지난 현대 사회에도 전쟁, 자본, 이념, 종교 등 세련되고 교묘하게 위장한 이기심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울고 있는데 말이다. 2,000년 핍박을 받고도 깨닫지 못한 인간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똑같은 지옥을 만들고 있는데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 경이로운 '차탈회위크'의 사회는 다음 문명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왜 사라졌을까? 8,000명 정도의 공동체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을까? 더욱 확장된 사회에서는 '효율성'이라는 탈을 쓴 이기심이 승리했을까? 이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사라지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중동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궁금한 점이 많아진다.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nya,_Turkey_-_panoramio_-_Robert_Helvie_%289%29.jpg)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nya,_Turkey_-_panoramio_-_Robert_Helvie_%289%29.jpg)

콘야(Konya)란 도시

콘야는 '히타이트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통치했을 때부터 존재했다. 히타이트 멸망 후 '프리기아 왕국' 때 도시로 발전했다. 이후 페르시아, 로마, 동로마, 셀주크 제국을 거쳐서 11세기 말 ‘룸 셀주크‘(=룸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다. 11세기 말부터 1308년까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던 '룸 셀주크'는 수도를 콘야(당시 이름은 Iconium)로 옮기면서 콘야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룸 셀주크는 ’셀주크 제국‘의 후신 국가다.  셀주크 제국 때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오늘날 튀르키예 인구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도 함께 유입된 후 현재까지 1,200여 년 동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탄생한 모든 국가의 주 종교로 자리 잡았다. 

룸 셀주크의 영토(사진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A3%B8_%EC%88%A0%ED%83%84%EA%B5%AD#/media/%ED%8C%8C%EC%9D%BC:Sultanate_of_R%C3%BBm.svg)
룸 셀주크의 영토(사진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A3%B8_%EC%88%A0%ED%83%84%EA%B5%AD#/media/%ED%8C%8C%EC%9D%BC:Sultanate_of_R%C3%BBm.svg)

콘야는 인구 약 2백50만 이상이 사는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큰 도시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앙카라 다음으로 큰 도시다.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하는 고원이지만 평야가 많아 농산물이 잘 자란다. ‘룸 셀주크’의 수도였기에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교역이 활발하면 여러 문명이 들어오고  다양한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바뀌는데 콘야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도시다. 룸 셀주크 시절 콘야에서 기독교 포교를 금지했다고 하니 종교에서 보수적으로 되면 사람들 성향도 보수적으로 되지 않나 싶다.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메블라나(Mevlana)’의 탄생지 콘야.

서기 610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완성된 이슬람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아랍어로 쓰인 코란은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에겐 접하기 어려운 가르침이었다. 이런 배경에 이슬람 왕조의 세속적 타락까지 겹쳐 반발이 일어났다. 코란을 읽지 못해도 기도, 명상, 노래, 춤 등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열망하는 신비주의 이슬람교도들이 등장했다. 이를 수피즘(Sufism)이라 하고 그 수도자들을 '수피'라고 부른다.

여럿 깨달은 스승들이 신비주의 교단을 만들고 영성 교육을 시작했다. 페르시아 대철학자 ‘잘랄레딘 루미’(Jalaluddin Rum / 1207~1273)도 그들 중 하나다. 콘야에 온 루미는 민중들에게 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코란을 따르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도 태초에 신이 창조한 순수 영을 만날 수 있으며, 이 영과 만날 때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루미의 사상을 추종하는 공동체가 ‘메블라나’ 종파다. 메블라나 종파는 모든 계층을 포용하는 박애주의와 민중에게 평화, 공생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오늘날까지 터키의 대표 종파로 자리잡게 된다.

메블라나는 처음 들어봤을지 몰라도 펄럭이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집단으로 회전 춤은 추는 사진은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춤은 메블라나 종파의 수피댄스 사마춤(Sama dance)이다. 루미는 이론적이고 현학적인 교리를 넘어 가장 단순한 행위로도 신과 일체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행위가  사마춤이다.

메블라나 박물관에서, 검정 겉 옷을 벗고 안에 입고 있는 하얀 치마를 펄럭이며 사마춤을 춘다. 
메블라나 박물관에서, 검정 겉 옷을 벗고 안에 입고 있는 하얀 치마를 펄럭이며 사마춤을 춘다. 

사마춤은 약간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두 손을 올리고 발을 이용해 빙글빙글 도는 춤이다. 악기 연주가 시작되고, 수도자들은 약 3시간 가까이 같은 방향으로 반복해서 춤을 춘다. 시간이 갈수록 음악은 빨라지고 춤은 더 격렬해진다. 루미는 이 행위를 영적 상승의 신비로운 여정이라고 했다. 이 여정에서 인간은 자아를 버리고 진리를 찾아 완전함에 도달하며, 이 영적 여정을 마치고 나면 더 성숙하고 더 순수한 내면의 영과 만나서, 온 인류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사람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즉 사미춤은 내면의 영은 깨우고 내면의 영은 사랑, 곧 이타심을 깨운다는 것이다. 

사미춤을 추는 루미의 동상(사진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B%AF%B8#/media/%ED%8C%8C%EC%9D%BC:%C4%B0zmir_Buca_Mevlana_heykeli_ve_mesire_alan%C4%B1_5.jpg)
사미춤을 추는 루미의 동상(사진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B%AF%B8#/media/%ED%8C%8C%EC%9D%BC:%C4%B0zmir_Buca_Mevlana_heykeli_ve_mesire_alan%C4%B1_5.jpg)

의심이 많은 나는 빙빙 도는 3시간 춤으로 신이 내려준 내면의 영과 만난다는 것이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 과도한 회전으로 인한 뇌 기능 장애에서 온 환각 현상이 아닐지 의심도 해본다. 하지만 이 의식은 750여 년 이어져 왔다. 그렇게 긴 세월을 이어올 수 있다는 것은 체험해 본 사람에게만 알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거다. 이 사마춤은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콘야에서는 매년 12월 첫째 주, 사마춤 축제가 벌어진다. 아래 영상은 2015년 축제 때 촬영 영상이다.

 

메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박물관은 1274년부터 1923년까지 루미의 영묘가 있는 사원이었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왕정지지세력이었던 메블라나 종파은 해체되고 사원은 폐쇄된다. 1927년 박물관으로 개방했다. 현재도 사원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루미의 영묘와 메블라나의 생활상 등만 보여주는 박물관 역할만 한다. 

루미의 영묘 
루미의 영묘 

입구에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메블라나 성인(지도자)의 관이 보인다. 관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 루미의 영묘다.

성인의 관 
성인의 관
성인의 관

성인들의 관에는 커다란 터번을 올려놓았다. 어떤 관에는 두 개의 터번이 있고 어떤 관에는 한 개의 터번이 있다. 아마도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벽 장식이다. 참으로 아릅답다. 
벽 장식이다. 참으로 아릅답다. 

루미의 애장품 같다. 한국 자개가 콘야에도 갔던가?

루미의 애장품
루미의 애장품

 

루미의 친필 액자가 아닐까 한다. 
루미의 친필 액자가 아닐까 한다. 

돔 천장의 문양이 특히 아름답다.  

천장 문양. 
천장 문양. 

 

천장 문양
천장 문양

 

천장 문양
천장 문양

별채에는 수도자들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 내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원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개방한 거라서 스카프는 쓰지 않아도 됐다. 신발 위에 헝겊 덧신만 신고 가볍게 달랑달랑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루미의 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다. 잠시 나도 기도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았으련만... 그저 뭔지도 모르면서 이슬람 건축과 장식의 아름다움에 빠져, 관광지에 온 것처럼 사진만 찰칵찰칵 소리나게 찍고 다녔다.

루미의 묘 앞 돌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있다 한다. “오라, 그대가 누구든. 신을 버린 자, 이방인, 불을 경배하는 자, 누구든 오라. 우리들의 집은 절망의 집이 아니다. 그대가 비록 백번도 넘게 회개의 약속을 깨뜨렸다 할지라도. 오라….”1

루미의 박애주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영적 여정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라도 가졌을 텐데.... 너무나 무식해서 루미의 영묘 앞에서 무례를 범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하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사원 앞 분수대도 무척 아릅답다. 
별채 모습

성인들의 아내와 딸의 묘소도 장미 꽃과 함께 야외에 있다.  

성인들 아내나 딸의 묘소
성인들 아내나 딸의 묘소

turkishmuseums.com에 들어가면 메블라나 박물관 사진이 있다. 영상으로도 만들어 놓았다. 사람이 없을 때 촬영한 거라 참 깔끔하고 아름답다. 특히 터키석 색채가 나는 푸른 첨탑이 무척 아름답다.

 

참고 사이트 : 다음백과, 위키백과
참고 사이트 : 유네스코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지
참고 사이트 : https://turkishmuseums.com/museum/detail/2131-konya-mevlana-muzesi/2131/1
참고 영상 :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의 중동본색 1강 - 아나톨리아 
참고 기사 : 흙수저·금수저도, 성차별도 없었다는 8000년 전 선사인들 삶터
각주 1) 참고 기사 : 읽다가 죽어도 좋아, 루미의 연애시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