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숲을 돌아 나오니 바로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곰배령은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워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강원도 인제군 귀둔리 곰배골 마을에서 진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귀둔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나 진동리에서 오르는 길 모두 험하지 않아 아이들도 충분히 다녀갈 수 있다. 할머니들이 콩자루를 이고지고 다녔던 길이라고도 하니..  

조금 올라가 사방을 훑어보니 동서남북 어디를 돌아봐도 멋지다. 이 풍광에 반한 사람들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천상화원'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푸른 초원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날씨가 한 몫 해주었다. 가끔 인간이 자연 경관을 망치는 방해꾼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곳은 사진 속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평화롭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일까?

곰배령은 1,164m 고지에 약 5만평 평원을 품고 있다. 어떤 산들은 정상 근처에 가면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영취산의 억새평원이나 한라산 정상아래 만세동산이 그렇다. 어떻게 깊은 산속에 이런 평원이 저절로 펼쳐지는지 신기할 뿐이다..

곰배령에 오르자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꽃은 푸른 자주색 붓꽃이다. 지금 제철인지 가장 많이 피어 있다. 붓꽃이란 이름은 꽃이 활짝 피기 전 꽃 모양이 붓을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한다. 혹 밤이 되면 저 붓이 각양각색 물감으로 곰배령에 꽃을 그려 넣는 건 아닐까?  잠자던 그 꽃들이 해가 뜨면 생명을 얻어 꿈틀대며 일어나는 만화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그런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냥 상상인가?  

▲ 붓꽃

그 다음 많이 눈에 띄는 꽃은 범꼬리다. 산골짝 양지에서 자라는 범꼬리는 꽃대가 쑥 올라온 것이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도 하고, 꽃차례 모양이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 하여 지어졌다고도 한다. 유난히 많은 표범나비가 범꼬리 꽃에 날아와 앉아 있다. 다른 꽃은 거들떠도 안 보고, 바람이 불어 같이 흔들리면서도 범꼬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표범나비도 아는 거겠지. 같은 범자가 들어가는 친구라는 걸...

▲ 표범나비와 범꼬리

광릉갈퀴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갈퀴나물은 현호색처럼 작은 새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 같은 꽃이다. 현호색은 키가 20cm 정도이지만 갈퀴나물은 키는 30~120㎝이다. 갈퀴란 말이 붙은 것은 줄기가 갈퀴같이 다른 것을 감아 올라가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광릉갈퀴는 키가 1m 정도 되는데 6월에 자주색 꽃을 피운다. 국내 산지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광릉'자가 붙은 걸 보면 광릉수목원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난 6월 초 금대봉에서 대덕산 가는 길에서 노랑갈퀴도 만났다. 노랑갈퀴는 키가 80cm 정도로 광릉갈퀴보다는 작다. 이 또한 국내에서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이다. 모두 귀한 존재들이다.

▲ 지난 6월 금대봉에서 만난 노랑갈퀴와 곰배령에서 만난 광릉갈퀴

곰배령 올라오는 길에서 곱게 핀 터리풀을 많이 봤는데 곰배령에는 터리풀이 없다. 대신 지리터리풀이 있다. 깊은 산 계곡 축축한 땅 양지에서 자라는 터리풀은 햇볕이 쨍쨍 내리 쪼이는 평원에서는 살 수 없을 거다. 지리터리풀은 아직 개화 전이다. 개화했다면 진하게 붉은 몽우리처럼 참 화려했을 텐데... 몽우리만 봐서 아쉽다. 지리터리풀은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된 지리산 자생 특산식물이라고 한다. 근데 어찌 곰배령까지 이사를 왔을꼬?

▲ 지리터리풀

워낙 작은 꽃이라 잘 눈에 띄지 않는 벼룩나물은 별꽃속에 속한다. 꽃이 작고 앙증맞아 애기별꽃. 벼룩별꽃이라고도 부른다. 벼룩나물은 꽃잎은 좀 특이하다. 꽃잎이 5개인데 끝이 2개로 갈라져서 꽃이 완전히 피지 않았다면 꽃잎이 10개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개별꽃만큼이나 예쁘다.

▲ 벼룩나물

푯말에 미나리아재비라고 되어 있다. 금대봉에서 실컷 봤던 미나리아재비 키는 50cm 정도, 왜미나리아재비는 20cm 정도, 산미나리아재비는 20-35cm라 한다. 자로 재어보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미나리아재비와 왜미나리아재비 중간 키 정도로 보인다. 고개를 넘나드는 산바람 때문에 크질 못한 걸까? 그런데 노랑 꽃잎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흰 꽃잎도 보인다. 변이가 오고 있는 건지.. 흰미나리아재비는 강화도에서만 자란다는데...

▲ 미나리아재비

정확히 하고 싶어서 <한겨레:온> 야생화 전문가이신 이호균 주주통신원께 문의한 결과 "꽃은 미나리아재비로 보이며 노란색이 퇴색하면 대개 희게 보인다. 식물도감에 의하면 미나리아재비는 털이 줄기에서 수직으로 퍼져나가는 반면에 산미나리아재비는 털이 위로 비스듬히 눕는다."고 하셨다. 원본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털이 줄기에서 수직으로 뻗어나간다. 미나리아재비 맞다. 이렇게 또 배운다. <한겨레:온>에 이호균 선생님이 계셔서 너무 좋다.

4-5월에 피는 할미꽃은 벌써 열매를 가득 맺었다. 할미꽃은 꽃대가 굽어서 '할미'란 말이 붙었다고들 생각하지만, 꽃이 지고 난 후 열매에 가득 달린 흰털이 할머니 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었다 한다. 내 눈에는 바람을 타고 새 세상으로 멀리 날아갈 준비를 마친 시공을 넘나드는 바람개비로 보인다.

▲ 할미꽃 열매

6월 초 금대봉에서 보았던 쥐오줌풀은 다시 봐도 예쁘다. 

▲ 쥐오줌풀

곰배령 산행 시작하자마자 나타났던 꿀풀은 곰배령에서는 아직 꽃을 달지 못하고 있다. 부지런한 꽃 하나만 고개를 쏙 내밀고 있다. 너무나 귀엽다.

▲ 꿀풀

돌나물과 식물들은 산과 바닷가 양지바른 바위에 뿌리 내려 자란다. 돌나물과에 속하는 기린초는 산행 초입에서 꽃을 피웠지만 곰배령에서는 아직 개화하지 못했다. 기린초는 키가 20cm 정도 되지만 줄기가 길게 쭉 뻗듯이 나온다. 그렇게 기린을 닮아 기린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해 촉망받는 젊은이란 뜻의 ‘기린아’에서 ‘기린’을 따왔다고도 한다. 기린초는 약초 이용 식물 중 기능이 가장 우수하고, 겨울에도 잘 죽지 않고, 메마른 바위에도 뿌리를 내릴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 산행 초입에 만난 기린초와 곰배령에서 만난 기린초

일찍 출발해서 아침도 못 먹고 갔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식사할 곳을 찾기 어렵다. 곰배령 근처에서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점심은 곰배령 900m 아래 계곡 옆 나무데크에서 먹던지, 남쪽으로 300m 정도 오르면 나오는 전망대에서 먹어야 한다. 곰배령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전망대로 올라가 점심을 먹고 나니 2시 가까이 되어간다. 사람들 대부분 내려가 사진 찍을 기회가 왔다. 왼쪽에 점봉산, 오른쪽 뒤로 멀리 대청봉이 보인다.  

전망대 바로 밑에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꽃개회나무가 군락 지어 피어있다. 전망대에서 점심 먹길 얼마나 잘했는가. 지난 북한산 털개회나무 글에서도 썼지만 두 꽃은 조금 다르다. 꽃개회나무는 새 가지에서 꽃이 나오고 털개회나무는 묵은 가지에서 꽃이 나온다. 잎 모양도 다르다. 털개회나무는 동글동글 달걀형이고 꽃개회나무는 살짝 길쭉 타원형이다. 꽃향기나 꽃 모양은 거의 구분하지 못하겠다. 근처만 가도 그윽한 향에 저절로 눈을 감고 숨을 쉴 정도로 둘 다 향이 그만이다. 丁자 모양의 연자주 꽃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같다. 햇볕을 마음껏 받아서 그런지 관악산 꽃개회나무보다 훨씬 색이 진하다. 못 보고 가나 보다 했던 꽃개회나무를 하산 직전 볼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 꽃개회나무

거의 2시가 되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 내려가고 없다. 이제 인간에게서 자유로워진 수많은 풀, 꽃, 나무들이 저들끼리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때다.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고요한 곰배령의 오후가 평온해 보인다. 

곰배령은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동안 약 850 종의 야생화가 핀다고 한다. 가을에도 은은하고 소박한 야생화가 드넓은 초원을 수놓을 거다. 가을에 다시 한 번 꼭 와봐야겠다. 

* 관련기사 : 북한산 사모바위 아래 털개회나무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31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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