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

오랫동안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신화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특히 「봉오동 전투 = 홍범도」는 아직도 견고하다. 「청산리 전투 = 김좌진」신화는 그 신화의 일부를 벗겨내고 「청산리 전투 = 연합부대」의 승리라는 역사의 진실에 조금 다가간 측면이 있다. 「청산리 전투」를 김좌진(북로군정서)과 홍범도 연합부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이라는 신화와 개인 영웅사관 중심으로 교과서가 편집돼 있음을 발견한다.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에 대한 사실 왜곡과 함께 홍범도, 김좌진 두 명을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처 : 하성환,  비상 출판사 181쪽을 글쓴이가 다시 촬영한 것임)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에 대한 사실 왜곡과 함께 홍범도, 김좌진 두 명을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처 : 하성환, 비상 출판사 181쪽을 글쓴이가 다시 촬영한 것임)

이는 그동안 역사학계 주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이 공식적인 학교교육에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젠 동서 냉전체제가 해체된 지 31년이 지났다. 더구나 1992년 한중수교가 체결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을 직접 답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 측에서 나온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2월과 3월 두 차례 방영된 KBS 『파르티잔, 늑대의 시대 1, 2부』는 그런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어떻게 독립군들이 일본군 최정예군대와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지 그 숨겨진 비밀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대 첨단을 달린 무기로 독립군들이 무장했다는 사실을 밝혀줬다.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총은 일본군 아리사카 소총보다 훨씬 화력이 우수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봉오동 독립군 무관학교를 통해서 오랜 세월 잘 훈련된 독립군 병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당대 최첨단 무기 구입과 실전 같은 독립군 훈련 등 그 모든 항일운동의 중심에 최운산 장군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이미 4차례 학술대회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기도 하다.

 

연변 박물관에 있는 최운산 장군 사진(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으로 북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앞두고 <한국사> 교과서에 반드시 기술해야 할 것이다.(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 박물관에 있는 최운산 장군 사진(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으로 북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앞두고 <한국사> 교과서에 반드시 기술해야 할 것이다.(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그럼에도 영화『봉오동 전투』(2019)나 『한국사』교과서는 역사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못했다. 여전히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시각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교과서에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 인기 강사들조차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교과서 서술이 어느 정도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는 검정 교과서로 8종류가 나와 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의 실체인 <대한 북로 독군부>를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는 씨마스 출판사가 유일하다.

<봉오동 전투> 승리 주역인 <대한 북로 독군부> 를 유일하게 기술하고 있는 씨마스 출판사 교과서 195쪽.(출처 : 하성환)  다른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홍범도, 김좌진  인물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영웅사관 중심으로 편집해 놓았다.
<봉오동 전투> 승리 주역인 <대한 북로 독군부> 를 유일하게 기술하고 있는 씨마스 출판사 교과서 195쪽.(출처 : 하성환)  다른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홍범도, 김좌진  인물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영웅사관 중심으로 편집해 놓았다.

다시 말해 「봉오동 전투」에 대한 실상을 조금은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 부대를 지휘한 최진동이나 최운산 장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는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군무 도독부 등 50여 개 무장 독립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무장 독립 단체들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일부가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대한 독립군과 군무 도독부의 연합부대)를 결성하였다. 일제는 무장 독립 단체의 국내 진입을 막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추격대를 파견하였다. 대한 북로 독군부는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하였다(봉오동 전투, 1920)” - 신주백 외(2021). 『한국사』. 서울 : 씨마스. 195쪽.

실제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이다. 그것은 <대한 북로 독군부>의 사령관이 최진동 장군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홍범도는 연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최진동 사령관 통행증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독립군 기지는 보안이 철저해 일제 밀정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군사적 요새였다. <대한민국> 2년  6월이란 표현과 <대한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란 표현이 특히 눈에 띈다.
최진동 사령관 통행증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독립군 기지는 보안이 철저해 일제 밀정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군사적 요새였다. <대한민국> 2년 6월이란 표현과 <대한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란 표현이 특히 눈에 띈다.

실제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 독립군이 동만주 왕청현 봉오동에 들어온 것은 5월 중순경으로 「봉오동 전투」의 중심 부대가 될 수 없었다.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를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회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6개 부대를 통합한 연합부대인 <대한 북로 독군부>가 결성된 것은 5월 19일이었다. 그로부터 18일이 지난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발생했다.

「봉오동 전투」승리 부대인 <대한 북로 독군부>의 무기와 군수물자는 모두 최진동 장군의 큰동생 최운산 장군이 제공한 것이다. 이는 러시아 연해주 체코 병단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최운산 장군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무기 이동 과정에서는 이범석 장군의 역할이 컸지만 북간도의 거부이자 대지주 최운산 장군이 없었다면 수 천 명 독립군들을 첨단 무기로 무장시키는 것은 애초 불가능했다.

실제로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대한 북로 독군부> 수 천 명 군인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서간도 우당 이회영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우당기념관(서울시 종로구 신교동 소재)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집단 망명을 주도하고 600억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3,500명 독립군을 길러낸 아나키스트 항일혁명가 이회영! 우당 선생의 치열한 삶을 기리기 위해 1990년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1년 서울농학교 앞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출처 : 하성환)
우당기념관(서울시 종로구 신교동 소재)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집단 망명을 주도하고 600억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3,500명 독립군을 길러낸 아나키스트 항일혁명가 이회영! 우당 선생의 치열한 삶을 기리기 위해 1990년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1년 서울농학교 앞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출처 : 하성환)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이회영이 있었다면 북간도 봉오동 군관학교엔 최운산 장군이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후대에 길이 알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교과서에 기술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국사』교과서 서술 형태도 살펴보자. 「봉오동 전투」승리 주역이자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 부대인 최진동 장군의 <군무 도독부>를 기술하고 있는 출판사는 비상, 해냄 에듀, 미래 앤, 동아, 씨마스, 지학사 여섯 곳이다. 나머지 천재교육, 금성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교과서엔 「봉오동 전투」승리의 핵심 부대인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에 만주의 한인 거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러한 열기는 1910년대 이래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맞물리면서 무장 투쟁의 전개로 이어졌다. 1919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만주 일대에서는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광복군 사령부 등 약 50개의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독립군 부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일본 군대와 경찰,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는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이에 일본군은 1920년 6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훈춘 부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무찔렀다.” - 『한국사』. 천재교육. 2021. 189쪽.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천재교육 189쪽(출처 : 하성환) 두 인물 사진을 중심으로 영웅사관에  기초해 교과서가 편집돼 있다.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천재교육 189쪽(출처 : 하성환) 두 인물 사진을 중심으로 영웅사관에  기초해 교과서가 편집돼 있다.

이렇듯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서술한 형태는 다른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부분을 금성출판사와 비상, 해냄 에듀를 통해 좀 더 살펴보자.

“3‧1운동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위해 만주 지역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북간도의 대한 독립군과 북로 군정서가 대표적이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진입하여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해 왔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크게 승리하였다.(봉오동 전투)” - 『한국사』 금성출판사, 2001. 184쪽.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의 중요성이 확산되는 가운데 각 지역의 독립군들은 국내 진격을 목적으로 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국경 지역을 수십 차례 공격하여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독립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자 일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 도독부,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봉오동 전투, 1920)” - 『한국사』 비상, 2021. 181쪽.


<봉오동 전투>에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언급하고는 있으나 다른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우선 배치함으로써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해냄에듀 출판사) 189쪽 (출처 : 하성환)
<봉오동 전투>에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언급하고는 있으나 다른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우선 배치함으로써  홍범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해냄에듀 출판사) 189쪽 (출처 : 하성환)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비폭력 노선에 한계를 느끼고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등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무장 독립 투쟁에 나섰다. 무장 독립군은 만주와 연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힘을 길렀다. 이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어 일제의 통치 시설에 기습 타격을 가한 뒤 다시 국경을 넘어가곤 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1920년 6월 북간도의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추격 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근거지였던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등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격해 오는 일본군을 봉오동 일대에서 기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봉오동 전투)” - 『한국사』 해냄 에듀, 2021. 178쪽.


모두 비슷하게 홍범도를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홍범도를 우선적으로 배치하여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전국에서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한국사> 교과서(미래앤 출판사).(출처 : 하성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언급하고는  있으나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신화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한국사> 교과서(미래앤 출판사).(출처 : 하성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언급하고는 있으나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신화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분위기가 높아지는 가운데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 기지를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군이 조직되었다. 독립군은 수시로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일본 군경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으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를 맞아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등이 연합 부대를 결성하고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하였다(봉오동 전투, 1920. 6)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4명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 한철호 외(2021).『한국사』. 서울 : 미래앤. 178쪽.


이젠 더 이상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서술하거나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의 핵심인물인 것처럼 서술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 「봉오동 전투」승리 주역은 홍범도가 아니라 최진동-최운산-최치흥이기 때문이다. 4차례 학술세미나와 그를 반영한 영상물이 공영방송을 통해 이미 소개됐다.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벗겨내고 준비된 독립전쟁 「봉오동 전투」의 실상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북간도 무장 독립군의 무기와 최운산>을 주제로 2019년 6월 14일에 개최된 최운산 장군 제4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북간도 무장 독립군의 무기와 최운산>을 주제로 2019년 6월 14일에 개최된 최운산 장군 제4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다가오는 2022년에는 해방 후 11번째 교육과정 개정이 이뤄진다. 현재 교육부 교육과정심의회가 진행되고 있다. 2022 교육과정은 총론부터 교육과정 기본틀이 전면 개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2025 고교학점제 도입도 그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서 기술된 내용들이다. 2022 교육과정 개정 때 역사의 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7년 전 잘못 기술된 내용으로 가르쳐야 하고 아이들은 왜곡된 내용을 학습하며 암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시 7년을 더 기다려 2029년에 가서야 개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다. 자유발행제가 아닌 검정제를 고집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동안 역사학계가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극복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냉전 시절 사료의 부족과 물리적 공간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냉전이 해체된 지 31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한 세대가 지나간 만큼 교과서 서술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독립운동사 가운데 러시아와 만주 지역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물을 역사학계는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은 구한말 항일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전봉준 장군이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그동안 축적된 역사학계 연구 성과물이 제대로 반영돼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극복하길 고대한다. 주류 역사학계의 뼈아픈 성찰과 실천을 촉구한다.

* 이 글은 <레디앙>에도 기고했습니다.  그리고 전체 내용을 1/2로 축약해서 <오마이뉴스>에도 기고했음을 밝힙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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