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패시장(七牌市場)과 남대문시장
남지 표석을 지나면 바로 칠패길이다. 칠패길은 조선 후기 이곳에 형성된 칠패시장으로 인해 생긴 도로명이다. 칠패 지역은 남대문 염천교 중림동 일대(현재 서소문공원) 지역을 말한다. 칠패시장은 상공회의소 앞에서 염천교 쪽으로 나가는 중구 봉래동 부근의 어물시장을 일컬었다. 지금의 중림시장 자리다. 칠패시장은 종루(종로사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 후기 도성의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칠패(七牌)는 지명이 아니고, 이 구역의 수비를 맡았던 금위영 소속 7패부대, 즉 7번째 순찰 구역을 담당했던 단위부대를 말한다. 현재 ‘순화동 더 샾’ 건물 모퉁이에 칠패시장 터 표지석이 있다. 조선 후기 군제는 도성 방위를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이 분담했다. 돈의문에서 숙정문까지는 훈련도감, 숙정문에서 광희문까지는 어영청, 광희문에서 돈의문까지는 금위영이 맡았다.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조선 초에는 그 자리에 상평창(常平倉)이 있었다. 상평창은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이었다. 물가가 내려갔을 때는 생필품을 사들였다가 오르면 싼값으로 팔았다. 17세기에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그것은 대동미(大同米)와 대동목(大同木) 등의 출납을 맡아보던 선혜청(宣惠廳) 창고로 바뀌었다. 1894년 조세금납화조치(租稅金納化措置)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줘 시장으로 삼았다. 남대문시장의 상품은 주로 마포, 용산, 서강 등의 포구로 들어오는 물자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남산 밑 회현동 필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일인들이 빠르게 주도권을 잡게 됐다.

칠패길을 건너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숭례문을 바라보면 그 일대가 주위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산의 산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내려앉은 산자락에 숭례문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목멱산자락은 소의문, 돈의문을 거쳐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인왕산의 줄기는 창의문을 지나 백악산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백악산과 인왕산에서 흘러내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이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동쪽으로 휘어지는 것이다. 그 대신 인왕산에서 용산으로 흐르는 만초천은 남대문 밖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대한상공회의소 건물과 명지빌딩의 담장도 밑바닥에 조금 남은 성곽 위로 얼마간 복원했다. 복원했다기보다는 복원한 시늉만 냈다고 할까? 여장이 없고 3m 정도밖에 쌓지 않아 단순한 담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 명지빌딩과 삼성공제회관 건물 아래에도 검게 그을린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옛것과 요즘 쌓은 것은 극명하게 대조돼 보기에 민망하다. 그 가냘픈 흔적일망정 주차타워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숭례성터길’은 왕복 4차선 서소문로와 만나면서 끝난다.

▲ 대한상공회의소 서쪽 담장에 복원한 서울성곽과 그 표지판
▲ 명지빌딩 담장에 복원한 서울성곽. 옛 성돌과 복원한 성돌이 대조적이다.

소의문 터를 찾다
서소문은 소의문(昭義門)의 속칭이다. 서소문로는 서소문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 서소문은 없어졌다. 도성의 문은 대개 그 부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므로 서소문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소의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곳이 차도가 생기기 전 능선이었을 것인데, 지금은 서소문로 고가도로 시작 지점에 해당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차타워 담장 위에 얹힌 소의문 표지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는데, 성곽 탐방객들의 불평을 들었는지 어느새 담장 밑 보도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표지석에는 ‘소덕문(昭德門) 터. 서울의 서소문으로 태조 5년(1396)에 세우다. 예종 때 소의문으로 고쳤고, 1914년 일제가 철거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예종 때 그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니까 엉터리 고증이다.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도록 지시하는 기록은 영조 14년(1738)에 처음 나오고, 소의문의 이름과 문루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영조 20년(1744) 8월 4일 기사에 나온다.  ‘소덕문을 속칭 서소문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초루(譙樓)가 없었다. 금위영(禁衛營)에 명하여 이를 짓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보고하므로 소의문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기사다. 이 기록을 통해 서소문에는 문루가 없었고, 홍예문만 있었던 것을 영조 때에 와서 문루를 올리고 이름도 고쳤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고친 시기가 왜 예종 때라고 했을까? 조선의 9대 임금 성종은 즉위 3년 차인 1472년 1월 11일에 선대 임금 예종(성종의 숙부)의 왕비인 장순왕후에게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이 존호가 소덕문의 이름과 같으므로 장순왕후의 존호를 더 존중하는 의미로 소의문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에 관한 당시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표지석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이 예종 때라고 한 것은 장순왕후의 남편이 예종이었으므로 한 번 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소의문은 인천과 강화 방면으로 출입하는 관문이었다. 또한 죽은 백성들의 관을 내보냈던 문이었고, 나라의 죄인이 처형을 받으러 끌려나갔던 문이었다. 그러니까 서소문도 광희문과 더불어 시구문(屍柩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894년 12월 25일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이 처형된 후 서소문 네거리에서 3일 동안 효수되는 참상도 백성들은 목격했다. 천주교 순교자들이 이 문을 통해 처형장으로 나갔으므로 외국인들은 서소문을 ‘순교자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표지석에 기록된 것처럼 소의문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철거됐다.

▲ 중앙일보 주차타워 담장 밑 보도에 있는 소의문 터 표지석.
▲ 중구 서소문로 고가도로 시작 지점. 여기에 소의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림동 천주교 약현성당(사적 제252호)
서소문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중림동 약현 언덕 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성당이다. 고종 23년(1886) 한불수호조약 체결 후 6년이 지나 고종 29년(1892) 12월 2일 완공됐다. 한국 최초의 성당으로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문을 열었다.

약현(藥峴)이라는 이름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이었다. 이 고개에 약초가 많아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약초 재배지가 그곳에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약초고개였던 것은 틀림없다.

약현성당을 이곳에 세우게 된 것은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집이 이 근처고,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때 천주교도 40여 명이 이 성당 아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순교자로는 이승훈, 정약종(정약용의 형), 황사영, 남종삼 등이 있다. 로마교황청은 후에 이 순교자들을 한국 103인의 성인에 포함해 시성(諡聖)했다.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된 기념물이다.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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