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언덕

허창무 주주통신원l승인2016.02.17l수정2016.02.1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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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언덕

성곽은 인왕스카이웨이로 끊겼다가 청운공원으로 다시 이어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줄기의 마지막 언덕이며,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들었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을 때 이곳에서 멀지 않은 누상동에서 하숙했다. 그때 그는 이 동산을 산책하면서 식민지 청년의 서러운 심정으로 가을밤의 별들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 무렵 저 유명한 「별 헤는 밤」이며 「서시」가 탄생했다.

그는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신으로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귀향직전에 독서회사건으로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교토제국대학생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복역 중이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 영화 '동주' 포스터 (왼쪽이 윤동주역 강하늘, 오른쪽이 송몽규역 박정민)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국의 감옥에서 참혹한 옥사를 당했던 불령선인, 그가 이 언덕에 금방이라도 나타나 투명하도록 창백하고 지순한 얼굴로 그의 자작시를 읊조릴 것만 같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세워진 시비

조국광복을 꼭 6개월 남겨놓고 애절한 삶을 마감했던 망국의 시인은 절절하게도 우러렀던 밤하늘의 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가 남긴 시만이 그의 고독과 방황, 숭고한 인류애와 애국심을 말해주고 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생애인가!

그 언덕은 이제 서울 시민들에게 추상의 언덕이며, 성찰의 언덕이며, 동시에 자유정신을 고취하는 언덕이 되었다.

2012년 7월 25일, 시인의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윤동주문학관도 개설되었다. 버려져있던 청운 수도가압장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특이한 것은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영감을 받아 재건축과정에서 발견된 5m 높이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한 것이다. 문학관 돌벽에는 『가쁜 숨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을 위해 폐쇄된 수도가압장에 윤동주의 시세계를 담아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더 걸어가면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 이른다. 창의문이 건너편에 보이지만, 바로 건너갈 수가 없다. 창의문길이 성곽을 잘라놓았기 때문이다. 길은 언덕 수 미터 아래에 있다. 창의문에 가려면 창의문길로 내려가서 벽산빌리지가 있는 곳으로 우회해야 한다.

▲ 윤동주문학관

인왕산 자락에 살았던 예술인들

이밖에도 인왕산 자락에는 예부터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살았다. 그 중 몇 사람을 들자면, 첫째 조선후기 헌종 때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으로 활약했던 정약대(鄭若大)가 있다. 그는 천년을 잇는 천상의 소리를 얻기 위해 10년 동안 날씨에 상관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른 아침이면 인왕산 꼭대기에 올라 대금을 불고 또 불었다.

제자 안민영(安玟英)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펴낸 박효관(朴孝寬)은 필운대(弼雲臺)밑 필운산방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음악활동을 했다.

박노수의 스승이기도 한 한국화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은 43년(1942-1972)간 누하동에서 살았는데, 그 가옥과 화실은 2005년 4월 15일에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 17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는 1923년 이용우(李用雨), 노수현(盧壽鉉), 변관식(卞寬植) 등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고, 1929년 조선미술전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1927년부터 동아일보 미술책임기자로 근무하면서 ‘청전 양식’이라고 불리는 한국적 산수화의 신경지를 개척하던 주목받는 화가였다. 그러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 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해직되고 옥고를 치렀다.

근대문학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1900-1943)은 1937년 부암동 325-2번지에 살면서 생계를 위해 닭을 길렀다. 그는 1921년 「빈처(貧妻)」로 문명을 날렸고, 1922년 홍사용, 이상화, 나도향, 박종화 등과 「백조(白潮)」동인이 되어 신문학운동에 가담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빈처」, 「운수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무영탑」, 「고향」 등이 있다. 현진건 또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렀다.

▲ 현진건 집 터를 알려주는 표지석

그밖에 천재작가 이상(李箱, 1910-1937)은 사직동에 살았고, 그의 친구이며 서양화가인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필운동에서 살았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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