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당(國師堂)

무악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경계지 초소에서 성안으로 능선을 따라가는 인왕산 등산로는 바로 성곽길이 된다. 인왕산등산로를 오르기 전에 성 밖 인왕산의 명물을 살펴보고 가야한다. 산록 아래로부터 차례로 국사당이 있고, 그 위에 선바위가 있다. 박완서가 소설에서 전자는 굿당이라고 하고, 후자는 형제바위라고 말한 바위다.

▲ 국사당

국사당은 일제가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목멱산 정상에 있었던 것을 철거했는데, 그때 해체한 건물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국사당이 일제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용인할 수 없어 이전을 강요했다고 한다. 남산에 있을 때는 목멱대왕을 모셨기 때문에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국가가 운영하지 않고 당주(堂主)가 소유하고, 무당의 요청에 따라 유료로 운영한다.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이다. 한국무속신앙에서 굿을 하면 시끄러우므로 민가와 좀 떨어진 산중턱에 지은 굿당 중 하나로 중요민속문화재 제 28호(1973년 7월 16일)로 지정되어있다. 건물양식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인데, 이전 당시 원래 사용했던 자재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지은 건물이다. 국사당 내부에는 단군, 조선 태조 이성계, 칠성신(七星神: 사랑, 재물, 성공, 행운, 무병장수, 소원성취, 복을 관장하는 신), 최영장군의 신인 신장(神將), 천연두와 관련 있는 별상신과 호구아씨, 점술과 관련된 곽곽선생, 예능의 신인 창부, 민중전(閔中殿), 산신령(山神靈)등의 무신도(巫神圖)가 있고, 무신도 옆에는 각종 무구(巫具)가 놓여있다.

▲ 국사당

선(禪)바위(서울시 주요민속자료 제 4회)

국사당 위로 시커먼 바위 둘이 나란히 서있다. 높이가 7~8m, 가로 11m, 폭이 3m쯤 되는 우람한 바위다. 얼른 보면 괴물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면 민머리를 하고 장삼을 걸친 탁발승의 모습과 흡사하다.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승려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선(禪)바위」라고 하는데, 항간에는 장삼바위라고도 한다.

가까이 가보면 바위에는 풍화작용으로 길고 둥근 구멍이 잔뜩 뚫려있어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바위를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빈다. 특히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가도하는 곳이어서 기자암(祈子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엇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바위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어 예전에는 이성계부부바위라고 하기도 하고, 이성계와 그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사이좋게 서있다고도 했다.

▲ 선바위

선바위에는 재미나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 초 도성 성곽을 쌓을 때의 이야기다. 국사당 위에 있는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넣을 것인가, 도성 밖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불교를 상징하는 선바위가 마땅히 도성 안에 있어야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학자인 정도전은 도성 밖에 있어야 불교가 쇠미해지고, 유교가 흥왕하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 결정권자인 태조 이성계는 그들의 주장에 결정을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왕사였고, 또 한 사람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개국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눈이 내렸다. 이성계는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가자는 정도전의 제언을 듣고 그와 함께 현장답사에 나섰다. 그때 오늘날의 도성 성곽 안쪽에만 눈이 녹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태조는 이 현상을 하늘이 내린 계시라고 생각하고,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의 경계선을 따라 성곽을 쌓게 했다. 그러니까 자연히 선바위는 성 밖에 남게 되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제 중들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의 예언대로 승려들은 조선시대 내내 도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한양도성의 경계를 눈 때문에 결정지었다고 하여 눈 설(雪)자가 들어가는 눈 울타리, 즉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ㄹ 받침이 묵음 화되어 서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서울 성곽을 「설성(雪城)」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와 인연이 깊은 인왕산 

이제 본격적으로 성 안쪽 등산로를 따라 등산을 시작한다.

선바위 위로 특이한 바위들이 잇달아 보인다. 선바위가 있는 계곡 건너 성곽 가까이에 어미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의 「모자바위」가 있는데, 두꺼비를 닮았다고 하여 「두꺼비바위」라고도 한다.

▲ 두꺼비 바위

성곽탐방로는 머지않아 곡장(曲墻)에 이른다. 곡장 바로 아래 곡장을 등지고 「부처님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얼굴바위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가부좌로 앉아 좌선하는 모습과 같다. 이래저래 인왕산은 불교와 관계가 깊은 산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연산군 때까지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산 이름도 인왕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대소 여러 채의 불사(佛寺)가 산자락과 중턱에 모여 있다. 조선 초기 한때는 서산(西山) 또는 서봉(西峰)으로 부르다가 기록상으로는 세종 때부터 인왕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신(仁王神)을 말하는데,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 하여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거나 나형(裸形)으로 주먹으로 치려고 하는 분노의 상도 있다. 일제는 어느 때부터 이 산 이름을 인왕산(仁旺山)으로 가운데 한자를 旺(왕)자로 바꾸어버렸다. 旺은 日(일)자와 王(왕)자가 합해진 것으로 자신들의 천황을 의미하려고 그랬던 것일까? 그러나 서울시에서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원래 이름으로 바꾸었다. 다행한 일이다.

무악재와 안산 방향으로 능선이 길게 뻗은 곳, 다시 말하면 부처님바위 뒤 봉우리에 설치한 곡장은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만든 시설이다. 평지의 치성과 같은 기능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의 전략적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지 지금도 거기에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지만, 미관상 달갑지만은 않다.

인왕산은 정상에 다가갈수록 가팔라지고 암반이어서 오르기에 숨이 차다. 성곽을 따라가다가 경사가 급한 곳은 깎아지른 암벽이어서 적군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곳은 암벽 또는 바위 자체가 성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천연의 요새다.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

인왕산 정상, 낙월봉(落月峰)에 오른다. 인왕산은 338m로 내사산 중에서 백악산 다음으로 높다. 인왕산 정상에서는 내사산 아래 집중된 서울을 가장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내사산 산정 모두 도성 안을 조망하기에 손색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단연 인왕산 정상의 조망을 선호한다. 무엇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바로 아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맞춤한 산정이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가장 중시했던 것은 주산을 정하는 것이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과 남산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을 동향으로 내야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일찍이 법궁의 정문을 동향으로 낸 적이 없다면서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리치고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았다. 그때 무학대사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도성이 큰 화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였을까? 개국 후 정확히 20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은 모두 불탔다.

조선 초 유신들의 주장에 따라 인왕산은 내사산 중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실제로도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 무악재는 원래 「모아재」라고 불렀다. 인왕산 호랑이가 행인을 해치므로 여러 사람이 모아서 재를 넘으면 호환(虎患)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한다. 이것이 나중에 발음이 변하여 현재와 같은 무악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된 기사가 여러 곳에 나온다. 고려 때 한성판관 강감찬이 노승으로 둔갑한 호랑이를 꾸짖어 그 호랑이가 무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갔다는 이야기며, 인왕산 호랑이가 무악재에서 고양시 효자리 선친의 묘소에 참배하러 다니는 효자 박태성을 매번 등에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 등 수없이 많다. 그렇지 않아도 곡장에서 정상으로 넘어가는 제 3봉인 주홀봉 능선에 웅크린 「범바위」는 인왕산의 고사를 뒷받침해준다고 할까?

인왕산은 온통 바위산이다. 군더더기 없는 정수만을 고스란히 남긴 정결한 모습이다. 산록에만 흙이 쌓여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아카시아 참나무 종류가 혼효림을 이루고 있고, 산중턱부터는 대표적인 양수(陽樹)인 소나무가 정상을 향해 포복하듯 엎드려있다. 한국적 진경산수화가 진면목을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산정에 오를수록 바위가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다. 백호를 닮은 산이기 때문일까?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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