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인왕산은 도성 안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조선후기의 대가 정선(鄭敾 1676-1759)은 비온 뒤의 산뜻한 풍경을 효자동쪽에서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겼고, 강희언은 자하문 근처 도화동에서 인왕산도(仁王山圖)를 그렸다. 전자는 갓 삶은 창포물에 머리감은 새아씨같이 말끔한 인상을 주고, 후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포효하며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강희언의 인왕산도

이미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이 작품들은 그때까지 성행했던 중국의 관념산수(觀念山水)에 대하여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을 실감나게 그렸다고 하여 실경산수(實景山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정조대 중흥기를 맞으면서 한국인의 자긍심은 회화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 인왕산 낙월봉(우측)과 주홀봉(좌측)

무엇보다 인왕산의 감명 깊은 정경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송홧가루 날리고, 아카시 꽃 질 무렵에 온다. 불붙는 석양의 꼬리를 물고 옥인동 골짜기 황록색 융단 위에 어둠이 내리면, 꾀꼬리와 두견새들의 진혼곡을 들으며, 때죽나무와 산목련의 붙잡음도 뿌리친 채 그 화려하나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아까시 꽃들의 적멸은 온다. 우수수 우수수 자살특공대처럼 떨어지는 낙화의 저 비장한 최후를 본다. 꽃필 때까지 고난에 찬 이승이었다 하더라도 저토록 단아하고 초연한 하직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그 심오한 향기, 달콤한 꿀, 담백한 아름다움을 모두 떨치고 가는 영면의 길이 열반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함은 미물에 애한 내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럴 때 골짜기 어귀에 이윽히 머물며 청승맞게도 「동심초」나 「이별가」를 부른다. 그렇게라도 해야 저 허무한 운명에 직면하여 흔들리는 나의 실존을 위무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왕산은 산록이고, 골짜기고, 중턱이고, 산정이고 할 것 없이 불교적인 이미지로 우리를 감화시키는 것이다.

▲ 인왕산 성곽의 곡장

인왕산에는 이름난 바위가 많다. 선바위, 모자바위(두꺼비바위), 범바위, 달팽이바위, 매부리바위, 기차바위, 해골바위, 치마바위, 장승바위, 부처님바위, 등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바위는 우리들에게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얼굴」을 떠올린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제하는 것은 황금도 권세도 아닌 각성과 성찰이라는 교훈을 주기 때문일까?

▲ 멀리 보이는 부처바위(얼굴바위)와 곡장

인왕의 저 높은 산정에서 망연히 바라보는 석양의 광휘와 곧 그 뒤따라 어둑한 핏빛으로 물드는 서울의 서부, 그리고 성저십리 너머 옛 개풍군까지 이어지는 김포평야의 아득한 지평선을 내려다보며 나는 조용히 저물어오는 황혼에 온몸이 묻힐 때까지 통일의 염원과 서울의 번영을 되새기곤 한다.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에서 경복궁이 보이는 쪽으로 크고 넓적한 바위가 치마처럼 쫙 펼쳐져있다. 이 바위가 치마바위라는 바위다. 이 바위는 중종과 그의 아내 단경왕후의 서글픈 사연과 관련이 있다.

▲ 인왕산 치마바위(중앙)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거사 전 미리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을 만나 반정에 참여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의 사위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신수근의 가담은 반정의 성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은 반정세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왕의 장인이 되느냐, 현재의 위치를 지키느냐 하는 기로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자기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겠지만, 연산군에게 밀고하지는 않겠다고.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신수근은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처단되었다.

신수근이 죽은 후 중종의 왕후가 된 신수근의 딸, 즉 단경왕후의 처리가 큰 문제였다. 반정공신들은 역적의 딸을 왕비로 뒀다가는 후환이 두려웠다. 결국 역적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명분에 따라 폐비가 된 신씨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친정은 인왕산 밑에 있었다.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 시절 금실이 좋았던 중종은 폐비가 그리울 때면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 아래 신씨 집 쪽을 바라보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신씨는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중종의 마음을 달래려고 신혼 때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매일 치마바위에 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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