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혼자 노는 아이

아들과 나는 서로 좋아했다. 아들의 눈빛에서 엄마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나도 아들을 무척 사랑했다. 요구사항이 많아 잠시도 쉴 수 없이 나를 달달 볶았던 딸과는 달리,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요구사항이 거의 없는 아들, 직장에 지친 엄마를 쉬게 해주는 아들이 고마웠다. 그 때를 생각하면 참 후회가 많이 된다. 언어발달의 결정적 시기에 책 한번 제대로 읽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아들은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 어려서 그런 지적 자극이 없어서 그러지 않나 싶다.

이렇게 '천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순한 아들에게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4살 정도 되었을 때까지 말을 다 알아듣기는 하지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남동생도 5살이 되어서야 말을 해서 동네에서 '벙어리 낳았다.' 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고, 남편도 말이 없는 편이라서, 집안내력이겠거니 생각했다. 4살 넘어서 갑자지 말문이 트이는 것 같았는데 주로 하는 말이 ‘차 이름’을 말하는 거였다. 그 당시 집에서 조금만 가면 육교가 있었는데 아들은 그 육교에 올라가서 지나가는 차를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한번 차 이름을 알려주면 잊어 먹지 않았다. 나중에는 지나가는 차의 앞을 쓱 보기만 해도 차 이름을 줄줄 알아맞혔다. 주변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천재라고 그랬다. 나는 차 후미를 봐야 아는데 앞만 보고도 정말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아이에게 좀 천재끼가 있나? 그런 생각도 했었다.

또 아들은 혼자 놀았다. 집에서도 누나와 놀기보다는 주로 누워서 혼자 놀았다. 미니카를 손에 들고 가만히 쳐다보거나 딩굴딩굴 중얼대면서 놀았다. 바구니 같은 것을 엎어 놓고 기어들어가 자신은 거북이라고 하면서 한참을 꾸물꾸물 대면서 잘 놀았다. 에너지를 최소한만 쓰려는 아이 같았다. 또래 아이들과도 잘 놀지 않았다. 여러 번 봐서 익숙해진 다음에야 조금 어울렸다. 하루는 친구가 놀러왔는데 혼자서 움직임 없이 노니까 이상해서 가서 발로 툭툭 쳐보기도 했다. 놀이터 같은 곳에 갔을 때도 잘 모르는 또래 아이들이 놀자고 다가오면 자리를 피했다. 늘 친구와 노는 것을 좋아했던 딸과는 아주 달랐다. 나도 어려서 혼자 놀기를 즐겼고, 남편도 그랬다고 해서 우리는 또 그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또 특이한 점은 자신에게 익숙한 패턴이 바뀌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음식도 새로운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먹던 것만 먹었다. 딸은 식당에 가면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요로쿵 조로쿵 평이 많아 사주는 재미가 쏠쏠한 반면에 아들은 '김' 아니면 '불고기'만 요구했다. 거의 한 두 가지 반찬만으로 식사를 했고 딱 자기 양만큼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쳐다 보지도 않았다. 이런 식습관은 나이가 들면서 많이 좋아졌으나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다.

옷 입기에서도 입던 옷만 입으려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이나 신발을 계절에 상관없이 입으려고 해서 자주 실랑이를 벌였다. 5살 봄, 5월이었던 것 같다. 일요일인데 할 일이 있어 나는 출근을 하고,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보라매공원에 놀러 갔다. 그런데 남편이 회사로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놀이터에서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미아보호소에도 없다고 했다. 보라매공원이 오죽 큰가? 나는 누가 데려갔으면 어쩌나? 하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아들을 찾은 상태였는데 아들은 아빠를 잃어버리고 저 혼자 집을 찾는다고 보라매공원 밖으로 나갔다가 아빠가 없자, 다시 보라매공원으로 들어와서 울며 돌아다니니 누군가 미아보호소에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들의 옷차림을 보고 정말 헉하고 놀랐다. 아들은 누나의 빨간 겨울 부츠를 신고 있었다. 양말도 짝짝이에 옷도 두꺼운 겨울 잠바를 입고 있었다. 미아보호소 사람이 “얘요~ 안 찾아갈 아인 줄 알았어요. 보통 그런 애들은 옷을 많이 껴입고 오거든요.” 했다. 나중에 왜 그렇게 옷을 입혔냐고 남편에게 물어보니 하도 고집을 피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단다. 아빠에게는 고집이 통하는 줄 알았었나 보다.

5살이 되면서 보육보다는 교육의 개념이 강한 유치원에 보냈다. 직장여성을 위하여 오후에도 반을 개설한 유치원이라 걱정 없이 아이를 보냈다. 5살 때에도 나는 아들에게서 뚜렷한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혼자 놀았고, 차 이름을 줄줄 말했다. 겁도 많고 눈물도 많았지만 가끔은 맘대로 자신을 다루려는 누나에게 대들 줄도 알아서 자기주장이 없는 편도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들은 누나를 무척 따랐다. 지금도 찰떡 남매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데, 어려서도 정말 사이가 좋았다. 누나가 쓴 일기장에서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렇다.  

1996년 9월 6일 금요일

오늘은 욱이가 캠핑을 갔다. 말썽꾸러기 욱이가 없어서 신이 났다. 엄마회사에 가서 그림을 기르고 책도 읽었다. 재미가 없었다. 나가서 놀아도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욱이가 있으면 재미가 있는데 .. 나를 괴롭히지만 없으니 재미가 없다. 욱아 빨리 와. 누나는 너가 많이 보고 싶어. 아프지 말고 건강해. 넌 귀찮지만 네가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 빨리 와. 욱아.

이렇게 누나의 사랑도 듬뿍 받는 아들에게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딸과는 달리 아들은 어떤 학습영역에도 관심이 없었다. 딸은 5살 되었을 때, 동갑내기 사촌이 글을 읽은 것을 보고 성화를 부려 <한글나라>라는 6개월짜리 한글습득학습지를 시작했는데, 시간만 나면 이리 궁리 저리 궁리 해보고는 한 달만에 제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 책을 곧잘 보았다. 그런데 아들은 5살이 되어도 책을 통한 학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 억지로 옆에 앉혀 놓고 책을 읽어주면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해줘도 금방 딴 짓을 했다. 책의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해를 못하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루종일 뭔 말을 중얼중얼 하긴 하는데 나는 아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또 아이는 뭔 말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자기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사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던가... 하는 말은 없었기 때문에, 아직 어려서 그런가보다... 늦게 가는 아이도 있는 거니까... 점점 좋아지겠지... 하고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 다섯 살 때(만으로 4살 되기 전)

아들이 6살이 되었다. 5살 때까지 잘 다니던 유치원에 안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매일 아침마다 통곡수준으로 서럽게 울었다. 어떤 때는 내 옷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도 울어서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를 유난히 예뻐해 주셨던 유치원통학차 기사 아저씨께서 “우리 큰 차 타러 가자”고 하시면서 손을 벌리면, 울면서 억지로 아저씨 품에 안겨 가곤 했다. 아저씨는 대형 유치원 버스를 운전하셨는데 아들을 자신의 바로 뒷자리에 태우고는 전체 아이들이 다 탈 동안의 버스순례를 해주셨다. 차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라서 그 시간만큼은 행복했던 것 같았다.

아침마다 그렇게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직장을 그만둬야 하나 마나 하면서 매일 속을 끓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새로 산 장난감을 갖고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오후에 가지고 노는 것으로 약속하고 보냈는데 저녁에 가방에 그 장난감이 없었다. 물어보니 서럽게 울었다. 어떤 형이 뺏었는데 오후반에 자신을 때리는 형이라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했다. 오후반은 직장 다니는 부모를 가진 아이를 위한 반인데 연령대를 나누지 않고 함께 모여 공부도 하고 놀이도 하고 잠도 자는 그런 반이였다. 선생님께 아들을 때리는 7살 형에 대해 주의 깊게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이미 형에 대한 공포심이 생긴 것 같았다. 그 형을 굉장히 무서워했다. 이를 어쩌나~~~ 하고 생각만 하고 있는 사이에 학부모 참관수업을 한다고 하여 5월경 유치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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