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초등 생활을 끝내고 중학교에 입학하다

우리가 이사 오고 나서 '현이'네도 몇 달 뒤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현이'와 현이 동생과 셋이서 맨날 어울려 놀게 되었다. 그런데 6학년 올라가면서 소꿉친구 현이 외에 단짝 친구가 생겼다. 성당에서 만난 친구 ‘규’라는 아이였다. '규'는 우리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아이로 성격이 온순하고 느릿느릿하면서도 자기 의사 표현이 분명한 아이였다. 배려심도 많아 아들과 잘 맞았다. 체구도 비슷했다. '규'도 학원을 다니지 않아 방과 후에는 서로 만나 자주 놀았다. 아들은 '규'와 현이 외엔 친구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접근하는 친구들은 좀 있었지만 아들은 그 아이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그 나이의 대부분의 남자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여자아이들도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대화에 욕을 섞어 말하는 아이들이 정말 싫다고 했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온 데는 아들의 학교문제 외에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들은 3학년 체육시간에 수영장에 갔다가 아토피가 확 솟아나게 되었다. 수영장에 뿌린 화학제품이 아들의 면역체계를 교란시킨 것 같았다. 팔꿈치 안쪽이 시뻘게져서 왔는데 가려워서 마구 긁었다. 그 때부터 아토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려움은 바르는 양약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그 양약 부작용이 심하다고 해서, 최대한 약을 쓰지 않고 자연요법으로 아들을 치료하기로 맘을 먹었다. 첫째로 농약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해서 동네 유기농 매장을 찾았는데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그런 매장이 없었다. 그 지역에 고객이 적어 온라인 주문으로 배달도 해주지 않았다. 할 수없이 사는 곳을 옮겨야 했다. 이사하는 곳 가까이에 유기농매장이 있는 지 먼저 알아보았고, 주변에 산이 있어 공기가 좋은지를 봤다. 마침 적당한 가격에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집이 있어 이사를 했던 것이다. 그 후 식품의 대부분은 생협이나 한살림에서 구입해 먹었지만 아들의 아토피는 쉽게 낫지 않았다. 아토피 때문에 6학년까지 아들을 옆에 끼고 잠을 잤다. 낮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가려워도 긁지 않고 가려운 곳을 때렸다. 밤에는 의지가 잘 작동되지 않았다. 아들은 밤마다 가려워서 잠결에 피가 나도록 벅벅 긁는다고 잠을 못 이뤘고, 나는 긁는 소리가 나면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자느라고 잠을 못 이뤘다. 숙면을 못하니 아들과 나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서로 편치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상한 병도 걸렸다. 마치 맹장염 걸린 것처럼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대굴대굴 구르며 허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해, 내가 업고 뛰고 해서 응급실에 수차례 실려 가기도 했다. 처음엔 원인을 몰라서 CT 촬영에 입원까지 했다. 나중엔 대장혈관 바이러스감염으로 밝혀졌는데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혹 학교가 너무도 가기 싫어 스트레스로 온 병이 아닐까 지금도 생각한다.

이렇게 밤에는 아토피가 괴롭히고 가끔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다 보니 발달이 정지되었는지 키도 크지 못했고 가시꼬챙이처럼 바싹하게 말라갔다. 아들은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시들시들해져 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 인생의 최대 암흑기가 아니었나 싶다. '왜 나를 이렇게 낳았나'고도 따졌고, '학교도 싫고,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드냐'고도 했다.

6학년이 되면서 아들은 중학교를 안가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꾸 물었다. 학교가 정말 싫다고 했다. 수업도 재미없고, 아이들도 싫고, 선생님도 싫고... 저렇게 학교를 싫어하는데 아들을 기존 교육시스템에 계속 둬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6학년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남편에게 대안학교를 생각해보자고 했다.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제천의 간디중학교에 방문하고 상담을 받았다. 아들은 선생님의 설명을 다 듣더니 딱 한 가지 질문만을 했다.

“정말 선생님이 안 때려요?”

이를 수차례 하고 또 했다.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웃으시면서 “정말 안 때린다”고 확인 해주셨다. 아들은 더 이상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간디중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10월에 있는 예비학부모 설명회도 갔고 지원서도 썼다. 지원서를 제출하기 바로 전, 갑자기 남편이 아들의 간디중학교 지원을 반대했다. 아들이 부모와 떨어져서 지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대안학교를 마치 정규교육에 낙오한 아이들이 가는 학교로 생각했다. 부모 모두의 동의가 없으면 지원서를 보낼 수 없어 결국 보내지 못했다. 지원서 마감일이 지나고 아들은 일주일동안 아빠를 원망하며 울었다.

그 이후에도 아들은 대안중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랐다. 남편을 설득해 겨울방학에는 김포에 있는 대안중학교에 방문했다. 하지만 남편이 시설이 열악하다고 또 반대를 했다. 남편은 대부분의 일상사에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편이 아니다. 특히 아이들 교육문제만큼은 나에게 전적으로 일임하는 편인데 대안학교 입학만큼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편의 주장을 무시하고 추진할 수가 없었다. 순한 남편의 고집을 아들의 애원으로도 나의 설득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아들은 실망해서 울고 울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들의 바램을 '이혼'을 무기 삼아 적극 대변했어야했나 하는 생각에 아직도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6학년을 졸업하고 그리도 가기 싫어하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규'와도 헤어지고 '현이'와도 헤어졌다. 반에서 아주 극소수만 배정되는 집에서도 좀 멀리 떨어진 낯선 학교였다. 

▲ 입학식 날

입학식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정자세로 앉아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데 책가방을 풀어놓지도 않고 앉아 있는 두 아이가 보인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둘 다 ‘언제 집에 보내주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 4번째로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아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을까? 앞으로 이 고난의 중학교생활을 어떻게 버티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 무척 측은해 보인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미경 주주통신원  mkyoung60@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순둥이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