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요구사항

아들과 <싸이>를 하는데 뉴질랜드 학교에서는 한글프로그램을 깔 수가 없어서 아들은 영어로 나는 한글로 의견을 교환했다.

아들이 <싸이>에 첫 번째 요구사항을 적었는데 King noodle을 보내달라고 썼다. 왕국수? 라면에 그런 이름이 있나? 잘 생각이 안나 제 누나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왕뚜껑사발면’일 거라고 했다. 아토피 때문에 라면을 질색하는 엄마 밑에서 살다보니 가끔 라면이 먹고 싶을 때면, 몰래몰래 편의점에 가서 즐겨먹는 라면이 바로 ‘왕뚜껑사발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너무했지 싶다. 아들이 출국할 때 한국 음식이라고는 라면 하나도 사서 보내지 않았다. 가서 한국 음식 먹고 싶으면 알아서 재주껏 구해 먹으라고 했는데 내가 너무 냉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한국 사람은 물론, 라면이나마 파는 Asian Mart 하나 없다고 하니 어디 가서 한국 음식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체국에서 제일 큰 박스를 사서 33개의 컵라면을 종류별로 보내주었다.

▲ 라면 먹는 긴머리 아들

그러고 났는데 아들의 생일이 되었다. 갖고 싶은 생일 선물을 말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선물은 필요 없고 ‘긴머리’를 갖게 교환학생 선생님께 말씀드려달라는 거였다. 원래 그 학교는 두발 자유인데 기숙사 학생들만큼은 머리가 귀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는 거였다. 아마도 단체생활의 위생상 그런 규정을 만들어 놓았을 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숙사에 있는 한 규정을 따라야지. 나는 아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규정 외의 것을 부탁하는 것을 좀 싫어하는 편이라서,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으니 거기 규정에 따라 살라고 잘라 말했다. 아들은 끈질겼다. 학교에다 부탁할 수 없으면 걸리지 않게 요령껏 기르겠다고 엄마 허락만 달라는 거였다. 뉴질랜드 학교는 잘못하면 반성문을 쓰는 것이 벌이다. 걸리면 영어 반성문 쓰느라고 저만 고생이지 내가 알게 무어람~ 솔직히 반성문 많이 쓰면 영어작문 늘게 되고,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그런 생각에 허락을 해주었는데 정말 요령껏 잘 길렀나보다. 학교에서도 별로 문제 삼지 않고 반성문을 한 번도 쓰지 않았으니..

그 다음 요구사항은 아주 은근히 지속적으로 하는 '돈' 이야기이다. 나는 아들이 갈 때 뉴질랜드 달러 1000불을 주었다. 가자마자 선생님께 말씀드려 통장을 만들고 뉴질랜드 10개월 동안 알아서 잘 나누어 쓰라고 했다. 평소에 아들은 용돈 관리를 잘했다. 마구 쓰는 적도 없고 피시방 비용 1000원도 아까워하는 저축형이라서 10개월 동안 잘 관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더니 제 돈 관리를 너무나 철저히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으로 구두쇠 노릇을 한 것은 전화카드에서 돈을 아끼는 것이었다. 처음에 20불짜리 딱 한 장 사서 다 쓰고는 내가 기숙사로 전화할 때까지 전화하지 않고 버텼다. 한번은 아들도 안하고 나도 안하고 3주가 지나갔다. 너무나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

나 : 아들, 왜 이렇게 전화 안했어.

아들 : 엄마가 해야지. 내가 돈이 어디 있어? 전화카드 값이 얼마나 비싼데. 나는 매주 일요일 7시에 엄마 전화 오나 하고는 기숙사 선생님 방 앞에 서있었는데.... 30분 동안 서있다 간 적도 있어.

흠... 지독한 넘... 하지만 30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하니 너무나 애처로운 모습이라서 내가 질 수밖에.... 할 수 없이 앞으로 전화는 엄마가 하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간식 비용을 말하는 거다. 운동 끝나고 사먹는 간식 값이 비싸다고 투덜거리는 거다. 뉴질랜드 봄방학동안 호스트 집에서 한글로 이멜을 보내왔는데 엄마의 동정심을 자극, 주머니를 털기 위하여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게 쓴 것 같았다.

“그나저나 키는 언제 크려나;; 점점 키 문제도 스트레스 받고 있어;; 키는 크는 것 같지도 않아;;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유도 먹고 그러는데;; 그리고 돈 아끼려고 싸면서도 건강에 안 좋은 것을 먹게 되고;; 탄산음료가 주스나 그런 것에 비해 많이 싸니까 자꾸 탄산음료만 사게 되고.. 빵이나 머핀보다 칩이나 과자가 싸니까 과자 같은 것만 사게 돼;; ”

돈타령이 하도 웃겨서 돈 떨어지면 더 보내 줄테니 돈 걱정하지 말고 주스나 빵을 사먹으라고 이멜을 보내주었다. 그랬더니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 그런가 아주 구체적인 숫자까지 단 이멜이 또 왔다.

‘내가 탄산음료 안사고 주스를 사면 탄산음료는 1.5L에 $1 하는데 주스는 1L에 $2,3 하니까 부담감이 생겨;; 그리고 칩도 190g에 $1.25 정도 하는데.. 빵은 한국처럼 맛있지도 않은데 머핀 6개가 쌀 때 $3야;; 좀 그렇지;;’

메일 내용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구~~ 쪼잔한 넘. 그램 수치까지 외웠구먼. 처음 준 그 돈으로는 10개월 못 버틴다고 아주 엄마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네 그려.'

하여간 아들의 요구사항이 ‘왕뚜껑사발면’에, ‘긴머리’에, '간식비용'이니 참 다행이지 싶다. 대인관계에서 까칠한 성격인 아들이 뉴질랜드 아이들하고 지내기 어렵다거나, 공부하기 어려워서 한국으로 도로 돌아가게 해달라거나 하면 내 머리가 얼마나 복잡해졌을꼬... 참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나저나 다음 요구 사항은 무엇일까? 좀 엉뚱한 아들이라서 4번째 요구사항이 은근 궁금해진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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