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대업

일찍이 법가 상앙을 등용한 진나라는 새로운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제의 틀을 만들어 강국으로 변했고, 이를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그를 도와 대업을 이룬 재상이 이사입니다.

이사는 초나라 출신입니다. 어렸을 적 뒷간에 앉아 일을 보는데 지저분한 시궁쥐 한 마리가 먹는 것도 부실하고, 또한 개에게 쫒기며 몹시 불안해하는 걸 봅니다. 그런데 곳간의 쥐는 쌓여있는 곡식을 먹으며 편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개가 다가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곤 깨닫지요. ‘인간이란 잘나고 못남이 쥐처럼 환경에 따라 정해지는구나.’

그길로 공자의 유가사상을 전승한 순자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를 합니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성악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라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이익을 구하고, 서로 미워하면서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예의를 배우고 수련해서 선하게 순화를 시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를 중시한 학자이지요. 순자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람으로는 한비(한비자)가 있지요.

공부를 마친 이사는 진나라에 들어가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다가 관직에 진출하게 됩니다. 순조롭게 승진을 하는데, 전편에서 언급한 타국 출신의 가짜 내시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타 지역 출신의 관리들을 추방시킵니다. 이사는 진시황에게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글을 올립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클 수 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깊을 수 있으며, 왕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그 덕을 밝힐 수 있습니다’ 로 이어지는 이 글이 워낙 명문인지라 진시황도 감동이 되어 축객령을 철회하지요.

▲ 진시황과 이사                                                                          사진출처 : 時光網

권력자였던 여불위가 자결을 하면서 이사에 대한 진시황의 신임은 깊어집니다. 그러다 법가이론의 집대성자인 한비가 쓴 책 ‘고분’과 ‘오두’를 본 진시황이 흠모를 표시하자,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봐 두려워 동문인 한비를 중상 모략해 투옥을 시키고는 독살합니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를 제안하여 황제가 직접 통치를 하는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합니다. 아울러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지요. 이사의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바로 문자의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약 6천 년 전 창힐이란 사람이 새의 발자국을 모티브로 상형문자를 만들어 썼고, 3000년 전에 은나라에서는 갑골문을 사용하였으며 점점 한자가 발전을 해나갑니다. 춘추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각 지역, 나라마다 말이 다르듯이 쓰는 한자도 조금씩 달랐지요. 이사는 전서체로 뜻과 글씨체를 통일하였습니다.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 새로운 형태의 통치제도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았습니다. 주나라 당시의 봉건제도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지요. 이사는 강력히 반대를 하였고,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역사, 의약, 복(卜),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에는 모두 불사릅니다(분서). 다음해 황제를 비판하는 유생들 460여명을 생매장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갱유). 이 분서갱유로 인하여 이사의 혁혁한 공과는 묻히고 말지요.

친구 한비자를 모함하여 독살한 이사의 말로 역시 다음 대까지도 가지 못합니다. 시황제 사후 이세황제는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이를 간하는 이사는 눈 밖에 납니다. 거기에다 환관 조고의 모함으로 이사는 공개 처형이 되며, 가족들도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초나라를 떠나 여불위의 식객이 된지 40여년, 천하통일의 최대 공로자 이사는 76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수천 년을 변함없이 내려오던 문화나 언어가, 시대가 달라지면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바뀌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의 하나가 화장실과 관련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모두가 공감했고 널리 쓰였던 말이, ‘처갓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었지요.

예전에는 화장실이란 말 대신 뒷간 혹은 측간(廁間) 이라 불렀고, 절에서는 지금도 근심을 해결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해우소(解憂所)라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厠所(측소), 최근에는 대부분 洗手間(세수간)이라고 씁니다.

합천 해인사에서 북쪽으로 만행을 떠난 중과, 묘향산에서 내려오던 중이 중간에 맞닥뜨렸답니다. 큰 절 규모를 자랑하고 싶어 한마디 합니다. "우리 해인사에는 대중들이 얼마나 많은지 국솥을 그냥은 저을 수가 없어서 배를 띄우고 노로 젓는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묘향산 스님, "내가 절을 떠나올 때 응까를 했는데 방금 전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이 허구한 날 싸움질만 하고 중상모략이나 일삼았던 건 아니었지요. 해동의 주자라 불렸던 퇴계 이황 선생에게 한 번은 제자가 물었답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하시면서 스승님은 언제 그리 애를 낳았답니까?” 퇴계, “내가 낮에나 퇴계지 밤에도 퇴계냐?” 실제로 퇴계 이황은 두 부인과는 사별을 하고, 나중에는 기녀를 소실로 두었다고 합니다.

▲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어린시절 꿈과 해학의 진수로 큰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백사(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사진출처 : 한국사 인물열전

백사 이항복과 이덕형의 고사는 오성과 한음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특히 백사 이항복의 재치와 장난은 아주 유명하지요. 어렸을 적 이항복 옆집에 권철대감이 살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벼슬이 높으면 하인들의 권세도 높아지죠.

이항복네 감나무가 담장 너머로 열린 감을 권대감네 하인들이 자기네 감이라고 못 따먹게 하자 8살 이항복이 대감댁에 찾아가 주먹을 불쑥 집어넣고 이 손이 누구의 손이냐고 물었답니다. 그 일로 권대감이 아들에게 사위를 삼으라고 했다고 하지요. 바로 행주대첩 권율 장군의 사위가 된 계기입니다.

이항복의 장난은 왕도 장인도 피해가지 못합니다. 어느 더운 여름 장인한테 찾아가 ‘날도 이렇게 더운데 오늘 입궐 할 때는 버선을 신지 마시고 맨발에 신을 신고 입궐하시죠.’ 권율장군, 딴은 그럴 듯하여 사위의 말을 듣지요. 입궐하여 회의 중에 이항복이 선조에게 주청을 합니다.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연로하신 대신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오늘은 모두 신발을 벗게 윤허하여 주소서!’ 선조가 허락을 하자 모든 대신들이 신발을 벗는데 권율 장군만 쩔쩔매고 벗지 못합니다. 왕이 연유를 묻자, 권율, “제 사위에게 속아서 맨발로 등청을 했습니다.”

한번은 선조가 백사를 골탕 먹이려고 들어오라고 하고는 등을 기대고 조는 척합니다. 이항복이 어전에 들어와 절을 올리고 멋쩍게 서 있다가 다시 절을 합니다. 그 때 눈을 번쩍 뜨고는, “지금 살아있는 나에게 두 번 절을 했단 말이오?” 이항복 느긋하게, “처음 절은 들어와서 찾아뵙는 절이고, 두 번째는 물러나는 절을 올렸으니 이만 물러갑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 중에도 이항복의 위트는 녹슬지 않지요. 주룩주룩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도망가는 피난 행차. 빨리 이동하자는 재촉에 "앞에 오는 비까지 뛰어가 맞을 일이 무어 있소?"

정유년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즐거워도 슬퍼도 세월은 그저 흐릅니다. 삶이 버거울수록 쉬엄쉬엄 가시지요.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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