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보다 더 먼저 만주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사연

6. 무오독립선언

백서농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만주에서는 일본의 간악한 흉계가 서서히 우리 동포들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아무리 청일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작은 섬나라일 뿐인 일본이었다. 그들이 비록 우리나라를 합병하고, 만주로 뻗어 나오고 싶었지만 중국이라는 큰 나라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간교한 꾀로 천천히 한 발짝씩 발을 들여 놓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안에서 발붙일 곳이 없는 독립투사들이 만주로 자리를 옮겨 독립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하자, 직접 만주로 쳐들어 올수는 없고 그냥 두자니 눈에 박힌 가시 같은데 우리 동포들이 모여서 힘을 기르는 것을 그냥 보아 넘어 갈수도 없어서 어떻게든 그냥 두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만주에서 무법자로 떠돌아다니는 마적단들을 이용 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불량배들을 마적단에 들여보내고 돈을 대어주면서 은근히 우리 동포들을 대상으로 도적질을 하게 하기도 하고, 마적의 두목을 돈으로 매수하여 우리 독립군이 있는 마을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는 마적들의 힘을 길러서 장차 만주라는 허울뿐인 나라를 뒤엎을 수 있고, 우리 독립군이 힘을 기를 수 없도록 하자는 계획 이었다. 만주 땅에서 마음 놓고 살 수가 없도록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일본의 흉계를 모를 리 없는 우리 독립군들은 그냥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을 수 없도록 목을 조여 오는 일본의 수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나섭시다.”

우리 독립군 무장부대들은 일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일본군의 진영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기도 하고, 보급물자를 빼앗아 오기도 하였다. 북간도의 독립군들은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북도의 국경지대에 있는 일본군의 기지를 습격 하였고, 이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을 날린 부대는 북간도의 홍범도부대, 최진동부대, 오동진부대, 안종석부대들 이었다. 서간도의 독립군부대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평안북도의 일대를 습격하였다. 이들 중에는 박장호부대, 최영호부대, 조맹선부대, 백삼규부대, 김원섭부대, 윤덕배부대들이 용맹을 떨쳤다. 이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귀신같은 부대는 홍범도부대였다. 함경북도의 포수 출신들이 모인 이 부대는 적은 숫자로 일본군의 부대를 습격하여 기를 죽여 놓았다. 오죽하면 일본군들이 홍범도 부대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도망을 칠정도 이었겠는가?

이에 당황한 일본은 만주에서 군사적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장작림을 설득하기 시작 하였다.

“만주에 들어온 조선인들은 모두다 국내에서는 살 수 없는 불량배들이오. 그들이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무력을 기르면 당신네 만주에도 이로울 게 하나도 없소이다. 요즘엔 마적단들도 함부로 조선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무장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품안에 호랑이 새끼를 길러서 장차 어찌하겠다는 것이오. 당신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다면 우리들이 해주겠소. 그러니 우리 경찰들이 조선인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허락만 해주시오.”

이런 꼬임에 넘어간 장작림이 경찰의 주둔을 허락하여 버렸다. 만주에 영사관을 설치한 일본은 많은 경찰을 파견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경찰권을 행사한다고 나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만주 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속셈을 뻔히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리어 우리 독립군을 도와주거나 일본의 움직임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알게 된 일본은 이제는 중국까지 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그들에게 협력을 하는 우리 동포들을 헌병보조원이라는 이름으로 훈련을 시켜서 간첩 노릇을 시키는 것이었다. 밀정이란 이름으로 우리 동포들에게서 미움을 사는 그들은 일본의 자금을 받아서 독립군의 부대에 몰래 스며들어서 독립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였다.

이와 함께 돈을 주고 마적단들을 시켜서 독립군부대들이 있는 마을을 습격하게 만들어서 만주 안에서 무장 충돌이 일어나면 이번에는 조선인들을 보호 한다는 이름으로 만주에 군인을 풀어서 중국을 침략하는 길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런 마적단 중에서 우리 동포인 장강호란 두목이 가장 악질적으로 우리 독립군 부락을 약탈 하였다. 그는 일본 헌병보조원들이 염탐한 우리 동포들의 움직임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일송은 이런 마적단들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동생 김동만에게 가족을 이끌고 중국인의 마을에 가서 숨어 있도록 하였었다.

“마적들이 내가 군자금을 모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나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있으면 가족들에게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니 부탁한다.”

이것이 아우 동만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독립의 길을 가는데 딴 데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농장이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지자 일송은 백서농장을 나와서 우리 동포가 더 많이 모여 사는 길림성으로 나가 왕청현에서 그 당시 만주 지방과 러시아의 영토 안에서 우리 동포를 이끌어 가던 독립운동지도자들인 여준, 김좌진, 서일, 류동설, 이동녕등과 함께 모여 이들을 중심으로 뭉친 동지 39명이 나라 안에서 일어난 3.1 운동보다 1 년 앞서서 󰡔무오독립 선언서󰡕(1918)를 발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정식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맨 처음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되찾고 말겠다는 각오를 들어 내놓고 보여준 역사적인 일이었다. 1918년 11월 13일(기미年 3.1독립선언보다 110일 앞선 것임) 왕청현의 중광단을 중심으로 발표된 이 독립선언은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고, 그들은 북간도와 연해주 그리고 미국의 국민회의등과 연합하여 별도의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독립선언은 나라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리 동포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만주에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만주에 있는 우리 동포를 모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독립선언서가 크게 국내외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남의 땅에 피난을 해온 사람들이 그것도 국내에서 있었던 3.1운동 이전에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뜻이 있는 일이었다.

이 독립선언서는

'......我(우리)大韓은 完全한 自主獨立과 我等(우리 모두)의 平等 福利를 我子孫黎民(우리 자손과 백성)에 世世相傳(대대로 이어 가게)키 위하여 玆(이)에 異族專制(다른 민족의 전제정치)의 虐壓(혹독한 압박)을 解脫(벗어나고)하고 大韓民主의 自立을 宣布(널리 알림)하노라.

我(우리) 大韓은 無始以來(나라가 생긴 뒤)로 我(우리)大韓의 韓(한국)이오 異族(다른 민족)의 韓(한국)이 아니라......韓(대한) 一部의 權(권리)이라도 異族(다른 민족)에 讓(줄)할 我(우리)가 無(없)하고 韓一尺(단 한자<치>)의 土(땅)라도 異族(다른 민족)이 占(차지)할(수) 無(없음)하며, 韓一個의 民(백성)이라도 異族이 干涉할 條件이 無(없이)하며 我韓(우리 대한)은 完全히 韓人(한국사람)의 韓(대한)이라....彼(너희)의 妖妄한 政策은 감히 宗敎를 痛迫(거세게 반대하고 압박)하야 神化의 전달을 沮戱(막고 우습게 여김)하였고, 擧人(사람을 추천함)을 制限하여 文化의 流通을 放過(방해하고 막음)하였고 人權을 剝奪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軍警(군인과 경찰)의 武斷(무력의 힘으로 억누름)과 移民(백성을 내몰음)의 暗計(숨은 계략)로 滅韓植日(대한을 없애고 일본을 심을)의 奸凶(간사하고 흉악한 짓)을 실행한지라 적극소극으로 韓族을 磨滅(없애려)함이 幾何뇨(그 몇이던가?).....此我(자 우리) 同心同德(한 마음 한 뜻을 지닌) 천만 兄弟姉妹여, 檀君大皇祖께서는 上帝(웃어른의 자리에 계신 임금)의 左右에 命을 내리셔 吾等(우리)에게 機運을 주시었다. 世界와 時代와는 我等(우리들)에게 福利를 주고자 한다. 正義는 無敵의 태이므로 此(이)로써 逆天(하늘을 거역한)의 魔(악마)와 島國(섬나라:일본)의 적을 一手屠決(한 칼에 목잘라 없애라)하라. 이로써 4천년 祖宗(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榮輝(영광이 빛남)를 顯揚(널리 알리고)하고 이로써 2천만 赤子(우리 민족)의 運命을 開拓할 것이다. 起(일어)하라 獨立軍 일제히. 獨立軍은 천지를 綱(그물처럼 잘 짜다)한다. 一死(한번 죽음)는 人(사람)의 屬할수 없는 바이므로 犬豚(개, 돼지)과도 같은 一生을 누가 笱圖(구차하게 바랄) 할것이냐 ?.... 殺身成仁(자기 몸을 바쳐 다른 사람을 구함)하면 2千萬 同胞는 同體(한몸)를 부탁한 것이다. 一身(한 몸)을 어찌 아낄 것이냐 ?.....一家(한 가정)의 犧牲을 어찌 아깝다 하겠느냐 ?... 東洋의 平和를 보장하고 人類의 平等을 실시하기 위하여 自立인 것을 銘心하게끔 皇天(하느님)의 明命(밝음 명령)을 袛奉(받들어 모시고)하고 一切의 邪綱(사악한 기강)으로부터 解脫(벗어나)하는 建國인 것을 確信하여 肉彈血戰(몸을 던져 싸우고 피 흘려 싸워서)하여 써 獨立을 完成할 것이다.'

이 선언서는 1919년 2월에 발표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그것이 기초되어 마련한 것은 정확히 3.1운동의 110일전인 1918년 11월 13일이었다. 1년 전에 3.1 운동에 앞서 이루어 진 것으로, 만주와 러시아 땅에 있던 우리 교포들에게 독립심을 불어넣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만주 독립선언이 발표 된지 거의 100여일이 지나서 드디어 국내에서도 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한자로 된 독립선언서를 한글로만 쓰니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 되어 부득이 일부 한자를 섞어 썼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원본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 원본 파일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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