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서로군정서'로 재출발

지시를 받은 일부의 만주지방 지도자들은 들어 내놓고 임시정부의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불모지를 개간하고 짐승들과 싸우면서 마적단들을 물리치고 삶의 터를 마련할 때까지 그들이 무엇을 해주었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닦은 터전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안됩니다. 우리가 먼저 정부를 세워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어찌 자기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그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게 옳은 것입니다.”

옳은 말이기는 하였다. 사실 만주에 온 사람들은 누구 도움을 받아서 이처럼 뭉치고 자기들이 살아갈 터전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손발이 닳도록 땅을 파고 나무를 베면서, 짐승들과 싸우고 마적단과 싸우고, 일본의 약탈과 감시를 피해 가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일송은 이런 작은 것 때문에 우리 동포들이 편을 가르고 다투는 짓을 용서하지 못하였다.

“내 비록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직을 마다하고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내가 여러분과 힘을 합쳐 나라를 되찾자는 생각이었지, 우리 동포들이 편을 갈라서 서로를 내세우고 싸움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었소. 나는 임시정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오. 전 세계에 선포한 우리 정부인데 누가 그 정부의 지시를 거부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따라 온 힘을 한데 모읍시다. 우리가 이렇게 해주어야 임시정부에 힘이 생기고, 힘이 생겨야 우리의 독립은 한 걸음 더 빨리 찾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임시정부의 지시대로 군정부를 없애기로 하고 군정부를 다시 임시정부의 조직 밑에서 만주지역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서로군정서'와 왕청현에 있는 중광단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였고, 북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대한국민회'를 만들어 이름을 바꾸었다.

▲ 일송 김동삼

서로군정서를 대표하는 독판(대표)에 이상용, 부독판에 여준, 정무청장에 양규열, 참모장에 김동삼, 교관으로는 지청천, 신팔균, 김경천이 뽑혔다. 그들은 농민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켜서, 독립운동의 동지를 양성하는 등 활약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훈련을 받은 독립군들 부대가 멀리 국경을 넘어서 조선총독부의 일본경찰을 13명이나 처단하기도 하였다.

북로군정서에는 사관연성소를 중심으로 용맹을 떨친 서일, 김좌진, 이범석 등과 잘 훈련된 12,500명의 군사가 있었다. 바로 이들은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었다.

북간도의 대한국민회에는 백두산 줄기를 따라 일본인들의 가슴을 서늘케한 명장 홍범도장군의 부대가 있었고, 봉오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최진동부대가 활약을 하고 있었다.

전부터 유하현 삼원보에 설치하여 운영 해오던 신흥강습소는 많은 애국청년을 훈련시켰고, 뒤에 통화현 합니하로 위치를 옮겨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군사학과 중등 정도의 학과를 가르쳐 왔다. 그러나 초기에 농사의 대흉작을 만나 식량난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게 되었다. 청년들은 실망한 나머지

“이곳에 눌러 있다간 굶어 죽기 알맞겠다.”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러시아의 땅으로 흩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김동삼, 김창환, 윤기섭 등이 남만주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동포여러분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우리가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비록 오늘 우리가 조금 배가 고프고 어렵더라도 독립용사들을 길러 놓지 못하면 자손대대로 이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 이 고난을 더 이상 대물림 하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독립투사를 길러서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는 힘을 길러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독립군 훈련소에서는 배가 고파서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교포들을 찾아가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우리 교포들의 실정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열변을 토하곤 했다. 이렇게 어떻게든 독립투사를 교육시키고 길러야 한다는 사정을 이야기 하자, 우리 동포들은 자기들이 먹을 식량을 아껴서 굶주림만을 면할 만큼 남기고 선뜻 내어 놓는 등 식량 후원을 해주어 겨우 학교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여름 본국에서 탈출해온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지청천, 김경천, 신팔균을 교관으로 맞아들이자, 청년들은 그들이 일본 군인으로 얼마든지 성공을 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왔다는데 많은 감명을 받아, 우리 동포 청년들의 입학 지원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장교가 무엇이 모자라서 이 산골의 독립군으로 돌아왔겠나? 보나마나 그들은 알고 있을 거야. 일본이 저렇게 날뛰다가 망하고 말 거라는 것을. 안 그런가? 그렇지 않다면 왜 저들이 마음 편히 잘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여기로 왔겠어? ”

▲ 일송정의 모습큰 대륙의 벌판을 배경으로 보이는 일송정

“어찌 되었거나 이제 우리도 정말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게 되었어. 일본놈들의 군사 훈련을 받으면 우리가 저 놈들을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도 알게 될 거야. 그렇지 않아?”

젊은이들은 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 또 그들의 훈련방법을 따라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해 5월에는 이 학교를 신흥무관학교(1920.5.3.)로 개편을 하여서 교장 이시영, 교성대장 지청천, 교관에 오광선, 신팔균, 이범석, 김경천으로 하여 매일 14시간씩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가르치는 과목은 학과 공부가 10%, 교련이 20 %, 민족정신 교육이 50%, 건설이 20%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훈련기한은 하사관반은 3개월, 장교반은 6개월, 특별반은 1개월만에 졸업을 하였다. 이렇게 철저하게 민족정신을 가르치고, 군사훈련보다 민족정신을 두 배도 넘게 가르친 것은 우리 동포들에게 나라의 귀중함을 가르치고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깨우쳐 알게 하기 위해서 였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불과 몇 개월 동안인 이듬해 8월까지 무려 2,000여명의 우수한 졸업생을 내었으며, 이들은 그들 스스로 '신흥학우회'를 만들어 자신들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이 학우회는 강력한 혁명청년의 비밀 단체로서 만주 동부의 세 성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초기에 가장 중심이 되는 조직이 되어 앞장을 섰으며, 일반 동포들에게 큰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또 국내의 거의 모든 독립운동과 관계되는 일에는 빠짐없이 참가를 하였다. 또 이들이 발행한 <신흥학우보>는 동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심어 주는 교재처럼 되어서 독립정신을 길러 주었다. 이들은 농사철에는 농사일과 아동들의 교육에 힘쓰다가 농한기가 되면 군사훈련과 우리 동포들이 잘 살기 위한 계몽교육을 실시하였다. 동포들을 모아 민간자위대(우리 동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방범조직으로 사실은 일본을 막기 위해서 조직함)를 조직하여 일본군 침략에 대비 하였다.

이렇게 우리 동포들이 한데 뭉치고, 활동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이 되는 상황 아래서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의 두 가지 일을 한 몸으로 맡아가는 일송은 한편으로는 독립 사상을 고취 시키면서, 또 한편으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으며, 그 실질적인 뒷바라지인 경제문제를 거의 혼자서 맡아 해결하고,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는 일을 맡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있는데 좀 도와주시오.”

“이렇게 서로 다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사 장비를 새로 좀더 구입해야 하겠다. 인원이 늘어서 장비가 부족한데요.”

자고새는 날마다 이렇게 일송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일송에게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대단히 슬픔 일이다. 선생의 아우 되시는 동만 동지가 왜군들의 습격을 받아 미쳐 피하지 못하고 순국하셨다.”

이 소식을 들은 일송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1921년 5월 서로군정서를 액목현으로 옮겼을 때, 자신이 돌볼 수 없는 가족을 돌봐 달라고 삼원보에 그대로 남아서 활동을 했던 아우 김동만이 왜군들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진 것이다. 일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만주까지 같이 와서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형을 돕고, 스스로도 독립투사가 되어서 싸우던 동생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돌보지 못할 처지인 가족들의 생계를 떠맡아 책임져오던 동생이 아니던가? 천리 타향에서 사랑하는 아우이자, 함께 싸워온 동지를 잃은 일송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동삼이 평생을 살면서 자기 한 몸의 편안이나, 자기 가족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천만리 머나먼 땅에서 함께 고생하던 동생의 죽음을 듣고 너무 비통하여 즉시 삼원보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함께 있던 동지들은

“적병이 각처에 깔려 있는데 함부로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내던지는 위험한 일이다.”

하고,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그는

“먼 땅에서 함께 고생하던 내 아우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어찌 자신의 위험만을 생각하고 그냥 좌시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날 밤에 출발을 하여 낮에는 수풀 속에서 숨고, 밤에만 샛길을 타서 겨우 삼원보에 당도하여 아우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하게 장례를 지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냥 되돌아 왔다. 그는 독립운동을 해오면서 많은 동지들의 죽음을 보아 왔지만, 항상 형을 도와 고생만 하던 동지이자 부모의 피를 같이 이어 받은 동생의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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