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단체의 통합과 민족자주를 부르짖은 일송은 끊임없이 단체통합을 만들어 가지만

[대한통의부]의 발족

통군부가 조직되고 약 2개월이 지나자 통군부가 조직이 될 때 만주지역에 있으면서도 눈치를 살피며 두고 보자는 식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항일단체들와 군단들의 참여가 논의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 불참했던 단체의 대표 등 71명이 1923년 8월 환인현 마권자에서 모여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되고, 처음 참여한 단체 이외에도 관전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등 8단 9회가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는 이름을 [대한통의부]로 바꾸니, 남만주의 대단합의 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통의부는 최고의 수령으로 총장과 그 밑에 10부 5감 9국과 의용군 사회장 등으로 기구를 크게 확장 하였다. 회의에서 총장은 김동삼을 만장일치로 추대 하였다. 이제 그는 남만주 항일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1923 년 8 월 23일 대한통의부로 발족한 당시 남만주 한족통일회에서 결의된 6개 항의 조직 개편안을 공포했다.

첫째, 각 군단과 각 항일 단체는 지금까지의 체제를 모두 해체 시키고 관할구역과 인물 그리고 재산 일체를 통합하여 새로운 기관의 제도와 인선, 모든 사항을 무조건 복종하기로 한다.

둘째, 새로운 명칭은 [대한통의부]라 한다.

셋째, 대한통의부가 거느린 독립군의 군호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이라한다.

넷쨰, 대한통의부의 제도는 총장제로 한다.

다섯째, 대한통의부는 헌장을 제정하고 그 9 장 63조를 의결한다.

여섯째, 선출된 임원을 인정한다.

이 같은 결의로 조직된 통의부는 중앙본부를 관전현 화류하에 두고 각 지방의 조직을 현마다 한두 곳의 총감사무소를 설치하여 총감 이하의 임원을 두었는데, 총감은 1,000호의 장으로 하고, 기타 지방의 조직은 상황에 따라 100호에서 200호로하여 관할구역을 4 ~ 5구로 나누어 '구장'을 두었다. 1923년 겨울까지 총감을 설치한 중요 지역은 통화현에 2개, 환인현에 3개, 즙안현에 3개, 관전현에 3개 등이며, 통의부의 관할구역은 8개현에 이르렀고, 그밖에도 여러 곳에 설치되어 모두 28개의 지부가 있었다.

이들 총감소를 중심으로 하여 한인의 지방자치 행정이 이루어 졌다. 그리하여 이 같은 행정부를 유지하는 한편 독립군의 군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 동포들은 일정한 기준의 부과금(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것이 대한통의부의 살림을 꾸려가는 수입으로 쓰이는 돈이었다. 23년 말에 각 가정에서 내어야 했던 부과금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의무금-- 3 원,

2) 사미대-- 2원 5각,

3) 교육비-- 3각,

4) 경종보대-- 1각

5) 독립신문 유지비-- 5 각,

6) 군비-- 7 각,

7) 군용 가죽신-- 두 켤레, 합계: 매호당 평균-- 7원 내외'

의용군의 부서 편성은 여러 독립군 부대를 통합 편성하여 의용군 제2대대와 유격대, 헌병대등 7개 중대로 구성된 단일 군단으로 조직되었다. 이 의용군은 대한통의부의 주권을 보호하고, 자주 국내에 들어가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이들 의용군의 계급은 장사, 정사, 부사, 참사 등 4등급으로 나누었고, 중대장과 소대장은 중국군의 위관의 복장과 비슷한 다갈색 군복을 입었고, 군모의 휘장은 은,동을 포함한 것을 썼다.

▲ 일송 선생에 관한 기사들<구글이미지 캡쳐>

이러한 의용군은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중대별로 각각의 관할구역과 특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또 각 중대는 무장한 정규군인 말고도 모손원, 조사원이란 이름으로 예비인원을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예비군까지 합하면 각 중대의 인원은 대개 7백명 이상 이었다. 각종 중화기 수 백정과 병력 약 2만명의 규모였으며, 관할구역은 남만주 전역 8현과 28개 지방총감이 있는 등 이때 군세가 강해서 만주지역은 물론 국경지대의 일본군을 괴롭히는 존재였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활약하여 일본기관은 물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없애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조직을 갖춘 대한통의부는 남만주를 중심으로 오랜만에 통합해야 한다는 숙원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통합할 무렵부터 간부들 간에는 이념이 달라서 약간의 잡음이 생기기도 하고, 조직상에 다른 생각이나, 자기 쪽의 사람을 좀 더 높은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는 불평이 있는 등 순조롭게 발전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러했던 당시의 사정을 '광복지서'는

'내부로 양기탁의 무리와 김덕원의 무리 등 양파의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서 같은 방에서도 서로 다투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순탄하게 진행이 되던 혁명에 상당한 파란을 일으키고, 좌절감을 주었다. 얼마 후 각처의 동지가 분분히 전보를 보내와 억지로 일장풍파를 해소하여 처음으로 평온함을 되찾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계기가 되는 일은 통의부를 조직할 때 국내에서 만주로 건너온 양기탁과 통군부를 조직할 때 경무감을 맡았던 전덕원의 사이에 사람을 쓰는데 대해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덕원은 통의부를 다시 조직할 때 그의 자리가 겨우 참모부감으로 오히려 낮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전덕원은 국내에서 최익현의 소막장으로 활약을 하다가 만주로 와서, 독립군 중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우러름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참모장이 아닌 참모부감에 임명이 된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또한 그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가 조선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임금님을 섬기던 우리가 이렇게 나라가 망했다고 이제는 임금이고 뭐고 필요 없다 우리가 주인이 되자고 나선다면 이것은 나라를 빼앗은 일본놈들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소. 나라를 되찾아 임금님을 모시는 나라가 되어야지요.”하고, 임금님을 모시는 나라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젊은 신진세력들은

“무슨 말씀이오. 임금님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일본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니 이미 임금의 자격을 잃은 게 아니오? 우리는 우리나라를 우리 손으로 세워서 선진국들처럼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반대로, 우리나라를 민주주의의 나라로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잘 융화가 안 되었다. 이런데다가 군인들의 간부들까지 새로 조직된 통의부로 통합을 하는데 아주 적극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되어가는지 보자는 식의 태도를 보여 어떻게 보면 완전한 통합이 아닌 형식적인 통합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다가, 제5중대가 맡은 무순, 본계, 흥경, 개원, 철령, 봉천, 동풍, 길림, 장춘지역에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제5중대장인 김봉명과 부대장인 조태현이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를 받아 누구에겐가 피살이 되고, 그 중대의 무기는 모두 통의부의 다른 중대에 의해서 강제로 압수되는 사고가 생겼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통의부의 인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통의부를 떠나 다른 조직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전덕원을 비롯한 채상덕, 김평식, 오석영, 박대호 등은

“우리가 獨立을 하려면 임금을 다시 모시는 조선을 되찾아야지 진정한 독립이지 임금님을 모시지 않는 독립이 무슨 놈의 독립이란 말이오?”

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왕정파)끼리 환인현에 모여 통의부에서 떨어져 나와 따로 '의군부'를 조직하여 분리해 나가고 말았다. 그들의 주장대로 임금님을 모시는 조선을 되찾고야 말겠다는 생각 이었다.

그러는 중에, 약 1 년 뒤에 의용군 제5중대 백광운 등이 여기에서 탈퇴하여 임시정부 '주만참의부'를 조직하는등 내부에서 신.구 세력의 갈등이 생겨서 이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끝내 실패하여 1924년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는'주만참의부'로 바뀌고 말았다. 김동삼은 이들이 따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보려고 온 힘을 다했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는 통의부에는 겨우 제4중대 이규성 부대만이 남아 있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다 겹쳐서 얼마 뒤에 왕청현 이도구에서 사회장 신팔균과 보초병 유경열이 중국의 마적에게 피살이 되는 등 슬프고 비참한 일들이 겹치니 그의 슬픔은 더욱 컸다.

*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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