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족유일당, 군민의회, 한국독립당 최고 위원으로 선출 되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 당해

15. 만주벌의 독립운동의 별이 되다.

김동삼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3부를 통일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28년 5월에는 길림성 화전현에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열고,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통일민족유일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여 수석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때 이 통합 대표회의에는 정의부에서 김동삼, 지청천, 이관일이,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황학수, 정신이, 참의부에서는 김승학, 김후하, 박창식이, 그리고, 동만주 교민의 대표로 김성호, 김동진이, 북만주 교민의 대표로는 이응서, 상해 임시정부측에서 홍진이, 중국에 사는 우리 동포 청년회총연합의 대표로 김상덕 등 25명의 대표가 모여서 4,5개월 동안이나 아주 진지하게 협의를 거듭하여, 조직으로 '군민의회'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교포 자치기관인 군민의회 위원장으로 김동삼이 추대가 되었다. 또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한국독립당 최고 위원으로 선출이 되었다. 이제 그는 만주독립운동의 완전한 지도자가 된 셈입니다. 이때 군민의회의 부위원장으로는 홍진, 군무위원으로 지청천, 김좌진, 황학수, 민사위원으로 김승학, 김후하 등이 선출되었으며, 무장조직으로는 각부에서 뽑은 가장 뛰어난 알짜배기들을 󰡔독립당군󰡕으로 다시 편성을 하고 보니, 약 5,000 여명이나 되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조직을 만드는데 반대해온 정의부 안의 협의회계는 현익철, 김이대, 신민회에서 행정파인 송상하, 참의부에서는 심용준 등이 모여서 자기들 나름으로 3부를 통일한 조직이라고 '국민부'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1929년은 김동삼에게 가장 바쁘고 불운했던 해였다. 한국독립당을 더욱 키워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한편 독립군의 조직을 하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11월 길림독군 희흡장군이 한국교포대표를 초청하여 한중연합군의 설치를 추진할 것을 토의하자고 제의해 왔으므로, 한국교포 측의 대표로 김동삼과 김승학, 김후하, 박창근등의 동지들과 같이 길림으로가 중국측과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펼 것을 의논하고 돌아오던 중, 그는 하얼빈에 살고 있는 옛 동지 정인호를 잠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길림에서 한중 연합회의가 열리는 것을 미리 정탐한 일제는 그들이 회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하려고 하였다. 사방에 거미줄처럼 일본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만주민족운동의 지도자인 김동삼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일송은 이러한 줄도 모르고 자신의 가장 충실한 동지 이원일과 함께 하얼삔의 정인호의 집에 들렀다가 계속 뒤를 따르던 일본 경찰의 밀정에 의해

“영사님, 저기 하얼삔 역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감시하다가 일송 김동삼이란 놈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저기 골목에 있는 정인호란 놈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 일송정 표지석<구글이미지 캡쳐 화면>

일본 영사관에는 이런 밀정의 보고가 들어 왔다. 일본 영사관의 경찰들은 이런 좋은 기회가 자기들에게 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정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정인호의 집을 겹겹이 둘러싸고 숨을 죽인 채 감시만 하고 있었다. 밖의 이런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송이 정인호의 집을 나서는 순간에 수많은 총구가 그를 향하여 겨누어졌다.

일송은 더 이상 어찌 해볼 기력도 없이 그들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다른 동지들도 돌아가던 길에 통화현에서 붙잡히고 말았으며, 김승학과 김후하, 박창식 등도 다른 곳에서 일본 경찰에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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