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 있는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가 재통합하자

11. '정의부'의 깃발아래

그는 다시 효과 있는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가 재통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1924년 7월 10일 재만통일회 준비회를 열기로 하고 남만주에 있는 각 단체를 돌아다니며, 이에 참가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통의부를 비롯하여 광정단, 의성단, 길림주민회, 로동친목회, 자치회, 고본계, 대한독립단(중도에 떨어져 나감), 학우회(중도에 떨어져 나감)등의 대표로 김동삼, 고할신, 이진산, 이천민, 김규, 홍진, 최명수, 이승범, 윤하진,신형규, 이장령, 김철 등 25명이 모여 의장에 김동삼을 선출하고 통합기구를 만들기로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인류 평등의 정의와 민족생영의 정신으로 조국 독립의 대업을 완수함을 목적으로 한다. 는 헌장 아래에 1925년 1월 '정의부'를 새로 결성을 하였다. 결성 당시에 의결된 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1) 지방의 치안 유지를 위해 무장대를 둔다.

(2) 통치구역은 당분간 하르빈 액목 북간도의 선을 그어 그 이남의 만주 전부로 한.

(3) 세입으로 매년 호당 년액 6원과 따로 소득세를 부과 한다.

조직은 중앙집행위원장 이탁(만주 사변이 있은 후에 변절함), 총무위원장 김이대, 군사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오동진, 민사위원장 김호, 법무위원장 이진산, 외무위원장 현익철, 검무감 최명수, 사령장 지청천, 참모장 김동삼, 사령부관 정이형으로 하고, 그 본부는 길림성 화전현 성내에 두고, 군사활동을 영구적이며 전면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교포들에게 경제시설과 문화기관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당시 장교중에서 우수한 인재는 운남, 광동의 군관학교에 유학시키는 한편 교육기관으로 각지에 있는 한국인 부락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또 중등교육을 위해 흥업현에 화흥 중학교, 유하현에는 동명 중학교, 그리고 화전에는 화성의숙등의 중학 교육기관을 열어 혁명간부 양성에 힘을 썼다. 또 기관지로 <성우>와 <대동민보>를 펴내어서 민족정신을 높이고, 혁명이념을 고취는데 애를 썼다. 뿐만 아니라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창설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안심하고 생활 할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청년 훈련소를 각지에 설립하였다. 또한 교포들에게 세금을 내게 하여 무기를 사들이고 군사훈련을 꾸준히 실시하여 국내진출을 위한 항일전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 정의부 소속 7개 중대의 독립군 활동은 아주 눈부신 것이었는데, 참모장 김동삼은 국내공작을 계획 하기에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의부는 1925년 3월에 국내 공작을 시작하여, 3월 19일에는 초산 일본경찰의 추목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관 5명을 사살했고, 바로 이날에 옹암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다수 빼앗아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어서 7월 4일에는 이진무, 김귀진, 김승엽등 7명의 독립군이 농민으로 가장하고 숨어들어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전부 빼앗아 왔다. 또한 그들은 부근의 부잣집인 양조장에 들어가 주인을 불러 앉히고

“너는 지금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과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동포들에게 술을 팔아 얻은 이익을 일본놈들에게 세금으로 바치고 있으니, 이것은 일본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냐? 지금 우리는 일본주재소의 순사들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아 가는 길인데, 만약 네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 독립을 찾겠다는 우리가 우리 동포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좀 내어 주기 바란다. 다만 네가 나중에 일본놈들의 등살에 견딜 수 있도록 너를 결박하여 놓을 테니 너는 결박을 당한 채 돈을 빼앗겼다고만 하면 될 것이니라.”

하자, 그도 우리 민족이었기에 기꺼이 돈을 내어 주었다. 이렇게 군사자금으로 4천원을 거두어 가지고, 선천을 거쳐 무사히 돌아와서 독립군의 용맹은 국내에서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제5중대장 김석하와 제7중대장 정이형은 대원 30여명을 거느리고 국내에 들어와서 8 월 18 일 벽동 일본 경찰 운시 출장소를 습격하여서, 이곳에서 일본경찰 3명을 사살하고 출장소를 불태웠으며 무기 전부를 빼앗았었다. 이렇게 마음 놓고 독립운동을 하게 되자, 독립군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평안도의 벽동, 초산, 철산 등에서 일본 경찰의 주재소를 자주 습격하여 위력을 떨쳤다. 특히 의용대원들 가운데는 관서총관소의 재무를 맡아보던 김희진이 뛰어나서 1923년부터 많은 활동을 해왔으며, 이진무는 뒤에 왜적과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어 독안장군(애꾸눈 장군)이란 별명으로 평안북도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1932년에 체포되어서 2년 뒤인 1934년 평양 감옥에서 처형이 되었다.

1925년 3월 상해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이 정식으로 논의되었다. 그 이유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된 위임통치안은 임시정부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것과, 재정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등 5가지를 들어서였다. 그리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임시의정원은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그 체재를 바꾸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박은식은 개정헌법에서 정한대로 3개월만에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1925년 7월에는 초대 국무령으로 정의부의 간부이며 서로군정서의 독판을 지낸 적이 있는 이상룡을 선출하였다.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에 부임하기 앞서 평소부터 서로 믿고 신망하는 김동삼을 만나

“일송선생, 당신과 같은 인물이 임시정부에서 일을 맡아 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내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갑니다만 곁에서 도와줄 믿음직한 인물이 필요해요. 나와 함께 가서 군무를 좀 맡아 주었으면 감사하겠소. 김동지 도와주시오.”

하고, 그에게 국무위원으로 입각(장관이 되어)하여 같이 가주기를 청했으나 김동삼은

“제가 이곳의 동포들을 버리고 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이곳에는 수십만의 우리 동포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만리타국에 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이들을 끌어안고 다독거리면서 독립의 그날까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하면서, 만주의 일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권유했으나 김동삼은 끝내 사절하였고, 하는 수 없이 이상룡은 서둘러 내각을 꾸미는 일에 착수하여 그를 노동총판에 발령을 하였다. 그리고 김좌진, 오동진 등 주로 만주에서 군사지도자로 활동하던 분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짜려 했으나, 당사자들은 모두 부임하지 않겠다고 사절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상룡은 이듬해 2월까지 내각을 꾸미는데 실패하고 결국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당시 김동삼이 임정에 참여하기를 사양한 것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내부 갈등에 큰 충격을 받은바가 있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독립기지로 터전을 닦아온 만주가 독립운동을 실천하는데 큰 힘이 될 것임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동만주의 정의부내에서는 이상룡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부임해 가자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각하여 서로 불신임결의와 의회 해산을 시키는 등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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