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의담의 쌍충 정려

 

보성 땅 미력면에는 높고 큰 쌍봉산이 있다. 그 아래로 정자천이 흐르고 있는데 정자천 옆 도개리 딱진개 큰 길가 눈에 들어오는 정려문이 있다. 임진, 정유 양란을 겪을 때 나라를 위해 몸바친 최씨 형제분의 큰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진 곳이다.

최억용(崔憶勇)은 탐진 최씨로 자는 경대(慶大), 호는 방촌(坊村)이라 하였다. 방촌의 내력은 고려말 평장사 장경공 은전(恩全)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정을 지낸 몽득(夢得)이셨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종조부 처호(處浩)를 모시게 되었는데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늘 웃는 얼굴을 하며 여자 같이 정숙한 몸가짐으로 모셨다. 또 팔의 힘이 세어서 어린 나이에도 활을 쏘아 백보 밖의 구멍을 뚫고 지나는 '百步穿揚' 묘기를 보일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

선조 때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 봉사로 있다가, 옥과 현감을 거쳐 여러 차례 바닷가의 만호(작은 해군부대)를 전전하였다.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공이 자자하여 칭송하는 백성들의 성화가 높았다.

▲ 의병의 활약<구글이미지>

임진왜란 때 박죽천 선생과 안우산 선생이 의병을 일으킴을 보고 용감히 나서 좌의장을 맡으신 임계영 장군의 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영남으로 나아가서 가는 곳마다 적을 토벌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적을 물리쳐서 몇 달 되지 않아 여러 읍을 다시 되찾았다. 하동의 수비를 굳게 하여 지키고 있을 때에 정탐을 나온 적군들을 모두 잡아서 감히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진주성이 함락 될 때에도 우의장 최경회와 함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적을 물리쳤으나 진주성은 함락이 되었다. 공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 진주성 싸움 <구글이미지>

이러한 공의 업적을 높이 사서 영남 선비들이 나서서 추천을 하였고, 호남에서도 이종백이란 유생이 임금님 앞에 올린 상소문으로 고종 임진년에 임금님이 직접 명하시어 정려를 세우게 하시었다.

 

또 공의 아우 남걸(南傑)의 자는 순필(順弼), 호는 삼수제<三守齊>라 하였는데 아우 역시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를 지냈고, 인조 임금님을 모시고 계해년에 좌의정 윤방, 영부자 정창연, 청음 김상헌, 월사 이정구 같은 중요 인사들과 함께 임금님의 가마를 호위하여 위험에 빠진 종묘사직을 지키어 내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인조 정묘년에 택당 이식이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을 기록하는 공훈록에 기록을 하고, 임금님이 내리시는 녹권(錄券:공신의 훈공(勳功)을 새긴 쇠로 만든 패)를 하사 하시면서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내리셨다.

▲ 진주성의 지도 <구글이미지>

고종 임진년에 다시 임금님의 높으신 은혜를 입어 형제의 공을 받드는 쌍충정려를 세우게 하셨다. 정려문을 세울 때에 유명한 면암 최익현 선생이 두 형제분의 공을 기리는 글을 썼다.

나라가 위급한 상황을 맞았을 때에 몸을 떨쳐 일어나 혁혁한 공의 세웠고 그 공을 나라에서 인정하여 쌍충(두 분이 나란히 충신으로 인정 받는) 정려를 세우게 되었으니 가문의 영예이기도 하지만 후세들이 보고 배워야 할 모범이 되어주고 있다.

두 형제분의 후손들은 미력면 용정리에 살고 있다.

 

<참고 : 湖南倡義錄, 湖南誌, 山陽誌, 山陽三綱傳,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9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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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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