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 소상진과 삼강문

임진왜란 때에 적을 박멸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그 용맹을 영호남에서 크게 떨친 보성 출신 우의장 임계영. 그 휘하의 선봉장으로 이름을 떨친 소상진 용장은 충절이 남달라 후세에 귀감이 되고 큰 추앙받고 있다.

▲ 삼강문 현판<구글이미지>

공은 진주 소씨의 후예로 자는 실보(實甫), 호는 서암(西庵)이다. 판도 판서 소을란의 후세로 만호 ‘소규’의 아들로 복내에서 태어났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 나고 용기도 있어서 사행감 주부를 지냈다. 임진란이 일어나 왜적의 침입으로 자기의 고장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내주고 있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단 한필의 말로 임금님을 따르는 길에 올랐다.

삼례역에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우의장 임계영이 영남에서 선전중임을 듣고 그 막하에 들어가 합세를 하여 별장이 되었다. 항상 홍의를 입고 선봉이 되어 돌격 투전하여 연전연승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이에 놀란 왜적들은 홍의만 보면 홍의장군이라고 겁에 질려 그의 예봉을 피하여 도망을 쳤다.

장군에 대한 진중 일화가 남아 있다. 부장인 장윤이 공의 용맹을 보고 말하기를 “국가가 믿는 바는 의병 뿐이요. 의병이 믿는 바는 오직 공 밖에 없으니 자중하여 적을 멸하는데 대비하자.”고 하니 공이 답하기를 “장부가 전지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랴. 국란에 순국하는 것이 나의 뜻일 뿐이라.”고 하였다.

임진년 12월 13일 성주대전에서는 불과 100여 장병으로 천여 명의 왜적들과 싸우게 되어 많은 적을 당할 수가 없었다. 퇴군함을 보고 칼을 뽑아 높이 들고 “적을 보고 피하는 자, 어찌 의병이랴” 하면서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좌충우돌로 분전하니, 이를 본 의병들이 별장의 용맹함에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소상진 용장은 싸움에 져서 도망치는 적의 대장 모리휘원(毛利輝元)을 추격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히 순절하였다.

▲ 삼강문 건물 안의 현판<구글이미지>

정란 후 조정에서 그의 숭고한 정충보국의 무공을 가상하고 통정대부예조참의를 증하고 나주 정렬사에 모셔졌다.

숙종 임금 때에 [一忠(상진), 二孝(행룡준위부호군 진국, 철근), 四烈(만호몽참처 전씨 학생 안국 처 황씨, 동하 처 조씨, 철근 처 고씨)]

첫째 : 1충 - 나라에 충성을 다한 충신 상진

둘째 : 2효자 - 부모님께 효성을 다한 두 효자. 행룡준위부호군 진국과 철근

세째 : 4열녀 - 만호몽참 처 전씨, 학생 안국 처 황씨, 동하 처 조씨, 철근 처 고씨.

▲ 소상진의병장과 자손드르이 정려각<구글이미지>

이렇게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함께 나온 집안은 전국에서도 드문 일이다. 오직 우리 보성의 ‘소’씨 가문에서만 있는, 그것도 모두 합하면 7사람이나 함께 칭찬받는 정문을 세운 것은 대한민국에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이렇게 모두 일곱 분의 훌륭한 행실이 모범이 되어 정려를 세우고 포상하였다. 복내면 원봉리에 삼강문을 세워 충효열 셋 모두 갖춘 소씨 문중을 길이 빛내고 후세의 본이 되게 하였다.

<참고 : 湖南倡義錄, 全南道誌, 山陽三綱傳, 보성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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