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의 세금을 거두어 주는 척 하면서 돈을 모아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던 면소의 작은 의인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이병찬 선생은 우리 독립지사에게 가장 무서운 독립군토벌대 세력이었던, 간도특설대 1기생으로 특설대에 있으면서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독립군의 정보수집이나 토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접촉하여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던 분이다.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나타난 간도특설대는 가장 악랄하게 우리 독립군을 위협하였고, 가장 위험한 세력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해방이 되자 바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군을 접수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군을 창설하자마자 국군의 지휘권을 접수하고 나서서 대한민국을 주물렀던 것이다. 바로 이런 무서운 세력이 간도특설대다.

▲ 보성읍에서 복내로 가는 길가의 메타세콰이어 길 1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괴뢰만주국에 소속된 900여 명 규모의 특수부대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간도특설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신현준 해병대사령관, 김백일 군단장 등 150여 명이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이 잡는다’라며 악랄하게 독립군들을 탄압했다.

이런 간도특설대에 그것도 제1기생으로 나와서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거의 180도의 전향이 아닐 수 없다. 독립군토벌대에서 독립군이 나왔다? 이거야 말로 참으로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李秉燦

○ 福內面 詩川里에서 출생

○ 1886년(고종 23). 11. 18~1962. 4. 23

○ 間島特設隊 1기생으로 1912년 경부터 滿洲의 독립운동 志士들과 연락 후 福內面事務所 회계담당으로 근무하면서 日貨 2,000앤(현재 약 2억 원)을 上海臨時政府에 독립자금으로 密送

○ 1915년 7. 15 大韓光復會 全羅道支部長에 被任 조직 확대 및 친일파 제거

○ 1921년부터 3년간의 獄苦를 치른 후 출옥하여 상해임시정부 民族戰線 全南 支部長으로 활약 救國 투쟁

○ 1945년 광복 후 1946. 12. 10까지 福內面長을 역임

○ 1950. 8. 15 建國勳章 愛國章을 追敍

독립군토벌특설대가 독립군을 잡는 일을 하지 않고, 도리어 독립군을 돕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향 면사무소의 회계담당자가 되어서 돈을 마음껏 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많은 돈을 만지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서 일본 돈으로 2000앤<현재 가치로 약 2억 원 정도의 돈>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사람들이 복작이는 장터는 늘 그들이 비밀 접촉을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고, 면사무소 일을 본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독립투사들과의 만남은 주민들과 접촉으로 위장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이 고장의 장날인 복내장터는 면사무소 이웃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오가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어서 숨은 조직인 상해임시정부 민족전선의 전남지부장으로 활약을 하면서 나라를 찾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무사히 해방을 맞았고, 해방직후 복내면장을 맡아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간도특설대라는 가장 무서운 독립방해세력으로 훈련을 받았고 임명이 되었지만, 스스로 그만두고 내려와서 고향 마을에서 작은 면소의 공무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독립자금의 마련을 위해 일부러 회계 사무를 맡아서 독립자금을 보내는데 활용을 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런 분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은 그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오늘의 경제대국, 민주선진국으로 발전을 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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