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5] 허창무 주주통신원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는 목장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고, 산등성이 두 개의 봉우리가 낙타의 등을 닮았다고 하여 낙타산이라고도 부르는 낙산(駱山)은 조선시대 내내 풍수지리설에 시달려왔다. 좌청룡이 우백호에 우선하는데,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은 해발 125m,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은 338m여서 우백호가 좌청룡보다 높아 왕위의 장자승계가 원만치 못했다는 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조선왕조의 적장자 왕위 승계는 27명 중 단 7명이다. 그것도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중에서 제대로 왕업을 이룬 왕은 숙종뿐이다. 다른 적장자 왕은 일찍 죽거나 반정으로 쫓겨나거나 했다.

그래서 한양 천도 초기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동쪽으로 내는 것)고 했으나, 당시 권신인 정도전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무학대사는 ‘그러면 좋다. 2백년 후에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고 개탄했다고 한다.

과연 2백년 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은 전소되었다.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하고 싶었던 이유는, 예전부터 인왕산에 인왕사라는 절이 있어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한다.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할까?

또한 풍수지리에 밝았던 하륜은 연세대학교 뒷산인 안산(또는 무악)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세종 때 풍수지리가인 최양선은 창덕궁 뒤 응봉을 주산으로 하자고 하면서 응봉이 주산이 되면, 낙산 밖 안암(고려대학교 뒷산)이 좌청룡이 되어 조정이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화마을의 풍경과 사적

낙산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며 동쪽 성곽 밖으로는 창신동, 서쪽 성안으로는 이화동을 내려다본다. 도성 안 높은 지대에서 도성 안팎의 경치를 감상하는 감회가 새롭다. 멀리 남쪽으로는 남산 너머로 아득히 관악산이 손짓한다. 관악은 외사산(外四山)의 하나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으로는 덕양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한다.

퇴락한 국민주택과 벽화마을

이화동 언덕에서 맨 처음 마주치는 동네는 1950년대 말 이승만 정부 시절에 지은 국민주택들이다. 지금은 너무나 퇴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많다.

그 당시 기술로는 2층에 온돌을 놓을 수 없어 1층에만 온돌을 놓고, 2층은 다다미방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일제시의 적산가옥 또는 일본식 후생주택으로 오인하기 쉬운 주택단지다.

그런데 이런 집에서 따스한 정취를 느끼는 것은 어인 일인가? 옛 서민 마을의 골목길이 그립고, 획일적인 아파트문화에 식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동네의 골목 돌담장과 축대에는 여기저기 벽화를 그려놓았다. 벽화마을이다. 꽃그림골목이라고도 한다.

이화마루텃밭에 이른다. 늘 푸른 배추와 무, 고추와 상추를 가까이서 만질 수 있는 곳, 행인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간이정자에 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성곽 밑으로는 암문이 마치 터널처럼 뚫려있다. 낙산구간의 두 번째 암문이다.

마을 골목마다 화분이 즐비하다. 텃밭 바로 앞 작은 마을박물관 건물 벽은 각양각색의 도시풍경을 그린 벽화가 환상처럼 펼쳐져 있었는데, 며칠 전에 가보니까 벽 전체가 괴멸되었다.

구경꾼들이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너무 시끄럽게 한다고 마을사람들이 없애버렸다고 한다. 길가에 면한 벽에는 천사의 날개와 하늘로 오르는 무지개길이 그려졌었는데, 그 벽체도 사라졌다.

너도 나도 천사의 날개를 타고 하늘나라로 오르는 사진을 찍느라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부산을 떨던 곳이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사라진 벽화를 떠올렸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의 갈피 속에 갈무리된 향리의 저녁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구름송이들이 꿈결처럼 아득했다. 그것들은 어찌 보면 비약하는 무용수 같기도 했고, 크라우디아 카르디나레의 유연한 머리물결 같기도 했다.

이화장(사적 제 497호)

낙산 서쪽 자락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은 신숙주의 손자이며 조선 중종 때 문신이었던 신광한의 옛집으로 광복 후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로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 별채에서 대한민국 초대내각을 구성했다. 현재 이승만의 양자 내외가 거주하며, 이승만의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사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까지 약 1km에 이르는 길을 1985년 5월 5일에 대학로라고 이름 붙였다. 낙산을 배경으로 한 이 길은 원래 실개천이 흐르던 곳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를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1960년대와 1970년대부터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곳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시위가 흔히 일어났던 곳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학생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대학로를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젊은이들의 광장이다.

마로니에공원은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를 관악캠퍼스로 옮긴 뒤 그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마로니에라는 이름은 1926년 경성제국대학교를 지을 때 가로수로 마로니에 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했다. 마로니에는 우리말로는 칠엽수다.

마로니에 가로수는 개선문으로 유명한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를 떠올린다.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가 아니라도 어쩐지 낭만적인 상념을 일으키는 이름이다. 레 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그립지 않은가?

이 공원은 도심에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지만, 연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 이곳은 시조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의 옛 집터로 오우가(五友歌)를 새긴 기념비가 서있다.

서울대학교가 옮겨간 후로 지금은 문예진흥원을 비롯한 많은 문화예술단체들이 이 공원 안에 들어있다. 붉은 벽돌 건물인 문예진흥원 청사는 1930년 지어진 것이다. 해방 후로는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옛 서울대 동숭동캠퍼스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분수대 뒤로는 일제 때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산화한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동상이다. 저 불꽃같은 영혼은 오늘도 우리들의 흔들리는 자존심을 붙잡아 준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sdm3477@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