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8] 허창무 주주통신원


동대문교회
이화마을 암문으로 나오지 않고 성곽 길을 그대로 따라 내려오면 바로 동대문성곽공원 뒤편으로 나온다. 성곽 언덕에는 목동으로 이전한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의 옛 병동을 리모델링한 ‘서울 디자인 지원센터’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중세 서양 어느 나라 제후의 성처럼 우람한 모습이다. 마치 패션문화를 창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동대문 쪽 성곽공원 언덕의 성곽을 가리고 있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다. 12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동대문교회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성곽복원을 위해 2014년 3월 철거됐다.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의 전신으로 국내 최초로 문을 연 부인병원인 ‘동대문부인진료소’(최초의 이름은 ‘동대문시약소’라 했음)에서 1890년 10월 21일 첫 정규집회를 열었고, 그 이후 1892년 진료소 바로 옆에 예배실을 지었다. 처음에는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볼드윈교회’라고 불렀다. 정동교회, 상동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감리교회다. 초대 담임목사는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으로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이화학당을 설립한 매리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이다.

이 교회는 정동에 있는 정동감리교회, 남대문에 있던 상동감리교회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던 교회의 하나다. 담임목사였던 손정도 목사는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3·1운동을 이끌었던 애국자다. 신도였던 김상옥 열사를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을 환영하러 나올 때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김 열사는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김상옥 열사는 1922년 12월 다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고 귀국했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의 암살계획이 시일을 끌게 되자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도망 다녔다. 1월 22일 1천여 명의 일경들에게 포위된 채 격전을 벌였다. 그때 15명의 일경을 사살한 후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방으로 장렬하게 자결했다.

그러나 2009년 8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로 교회 건물은 철거됐다.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복원사업계획을 우선시한 것이다. 그때 법원은, 서울 성곽은 600년 이상 된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큰 역사적 가치가 있는데, 노후한 교회 건물과 주차장이 성곽 일부를 점유하고 있어 경관을 회복하고 훼손된 성곽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 이유를 적시했다. 문화유산은 그 자리가 역사성을 갖는 것인데, 120년 이상 된 근대문화유산의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화여대 동대문병원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진료소는 어떻게 설립됐던가? 이 부인진료소는 1886년 10월, 이화학당을 설립했던 스크랜턴 여사와 그의 아들 스크랜턴이 조선사회의 남녀유별 풍습에 따라 여성전용병원을 세워줄 것을 미국 북 감리교 선교부 여자 외국선교회에 요청함에 따라 이뤄졌다. 1887년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웠던 이 진료소의 설립자는 하워드(Miss Meta Howard)라는 여의사였고, 고종은 그 진료소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유교를 숭상했던 나라에서 부녀자들이 신체의 은밀한 곳을 남자의사에게 보일 수 없었으므로 이 부인진료소는 여의사만 부인병을 진료했던 병원이었다.

그런데 1890년 10월 21일에 동대문부인진료소에서 첫 교회집회를 열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 진료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시약소’ 또는 ‘보구여관의 동대문분원’은 아마도 1890년 상반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1892년에 세워졌다는 기록을 따르면 전후의 사정에 혼란이 따른다. 여하튼 그 후 1892년 세운 동대문부인진료소는 미국 북 감리교 선교부 총무였던 볼드윈(L.B. Baldwin)부인의 기부금으로 지었으므로 그 이름을 ‘볼드윈진료소’라고 했다. 볼드윈진료소는 1910년 그곳에서 의료봉사를 했던 의사 해리스(Dr. Lillian Harris)의 이름 따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개칭했고, 같은 해 정동에 있는 최초의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을 합병했다. 보구여관을 본원이라 하고 동대문부인진료소를 분원이라 한다면, 분원이 본원을 합병한 것이다. 그렇다면 분원의 역사가 본원의 역사를 승계했다고 볼 수 있다.   

맨 처음 개신교 개척기에 왜 교회보다 먼저 병원이나 학교가 설립됐을까? 첫째 이유는 조선정부의 강력한 금교정책(禁敎政策)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선교사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병원과 학교를 먼저 세웠다. 그런 방침은 효과적인 선교방법이기도 했다. 의사이기도 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랫동안 친숙하게 지내면서 선교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육체의 병이 나은 사람들은 친지들에게 의료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친 치료를 선전하고 이를 통해 전도의 문을 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또한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주는 행적이 아니었던가! 학교도 마찬가지 이치였다. 문맹을 퇴치해줌으로써 장기적인 포교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유교와 도교와 무교의 나라에서 동서양의 종교문화가 확연히 다른데, 갑자기 성경 말씀을 전도하려면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맹을 깨우쳐주고 병을 치료해주면 장황하게 설교하는 것보다 전도의 효과가 빠르게 나타났다. 정동교회보다 배재학당이 먼저 설립되고, 동대문교회보다 동대문부인진료소가 먼저 설립된 것도 같은 이치다.

이 자리에는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도 있었다. 1892년 교회와 진료소와 학교를 함께 지은 학교였다. 지을 당시의 이름은 기금기부자인 볼드윈의 이름을 따라 볼드윈 교회나 볼드윈 진료소와 마찬가지로 볼드윈 여학교였다. 그 교명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12월부터 동구가정실수학교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 현재의 이름으로 됐고, 1961년 3월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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