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11] 허창무 주주통신원

하도감 터
일제는 왜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 서울 성곽을 허물면서 경성운동장을 만들었을까? 본래 이곳에는 조선 시대 훈련도감의 하급부대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하도감(下都監)과 화약 제조 관서인 염초청이 있었다. 고종 때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군 대인 별기군이 있던 자리도 거기였다.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가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킨 곳이 이곳이다. 이때 공병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를 포함해 일본인 13명이 살해됐다. 분노와 상심에 찬 일본인들은 이곳을 없애려고 했을 것이다.

이 자리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나라의 원세개 군대가 진주했던 터였다. 여기에 있던 청군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창덕궁으로 쳐들어가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고종을 강제로 이곳 청군 진영으로 데려갔다. 고종은 하도감 터 청군진영에 있다가 정변이 끝난 후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하도감 터는 한일합방 후 일제강점기에 훈련원공원이 됐다. 그때 몇 동의 건물과 연못 등이 들어섰다. 이 자리는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자리다.

이후 동대문운동장의 변천 
1926년 이 운동장이 준공된 후 그해,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路祭)가 있었다. 종주국의 황태자 결혼기념시설에서 식민지 마지막 황제의 장례를 치렀다니 역사의 잔인함이 뼈에 사무친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경평(京平)축구전이 열려 수만의 관전자들이 민족의 울분을 달래기도 했다.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 서울운동장이 됐다. 해방 후에는 암살당한 몽양 여운형 선생(1947)과 백범 김구 주석(1949)의 장례식이 치러지며, 비운의 애국자를 애도하는 민족의 눈물이 이곳에 뿌려졌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찬탁과 반탁 세력이 집회를 열었는가 하면, 좌익과 우익의 대규모 집회가 열려 격렬한 충돌을 일으킨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 1972년에는 축구황제라 불리었던 브라질의 펠레가 뛰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 고교야구 열풍에 이어, 1983년에는 K-리그 야구대회가 여기서 시작됐다.

1984년 9월 잠실운동장이 개장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개명됐다. 이후 슬럼화가 급속히 진행돼 서울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를 만들기로 하고, 2007년 12월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했다. 2006년 12월 4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는 한국 야구 성지인 이 운동장을 철거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7년 체육인 100명은 ‘동대문운동장 보존을 위한 스포츠 100인 선언’ 기자회견에서 근현대 한국 스포츠의 역사적 현장을 철거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위해 국제현상설계공모를 시행했다. 2007년 8월 이라크 출신 영국 여성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환유(歡遊)의 풍경’이라는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주선을 닮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물이다. 그러나 이 장소가 뜻하는 다양한 역사, 문화, 도시, 경제, 사회적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해 환유의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설계자의 의도가 현재 빛을 잃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왜일까. 600년 역사를 간직하는 공간에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의 티타늄 외벽이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갈 것처럼 경박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성곽이며 이간수문이며 유구전시장이며 운동장의 잔존시설 등,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기도 어려워  보인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는 몇 개의 전시관이 있고, 땅 밑에 묻혀 있다가 발굴된 옛 성곽이 어중간하게 복원돼 있다. 복원된 것은 체성도 완전하지 않고, 여장도 올리지 않았다. 복원하려면 원형대로 해야 의미를 살릴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운동장 안 성곽의 중간쯤에 있는 치성(雉城)이 시선을 끈다.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여기 있는 것처럼 네모난 것이면 치성이고, 원형이면 곡장(曲墻)이라고 한다.

이곳에 치성을 쌓은 이유는 도성 안에서 이 구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적군을 방어하는데 취약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인지문에는 옹성을 쌓고, 흥인지문에서 광희문 남쪽에 이르는 구간에 5개의 치성을 집중적으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관람하기 위해서 효율적인 동선을 따라가 보자. 동대문 쪽에서 들어오자면 먼저 이벤트홀과 마주친다. 이곳은 서울 성곽의 역사를 여러 가지 사진으로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이벤트홀 옆에 동대문운동장역사관이 있다. 동대문운동장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운동기구며 각종 경기 기록, 명승부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서울운동장과 동대문운동장은 역사의 피안으로 사라졌지만, 1966년 우리나라에 처음 설치된 야간 경기용 조명탑 2기와 성화대는 그대로 남아 전성기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중앙으로 나오면 동대문유구전시장이 있다. 그 자리는 하도감이 있던 자리여서 하도감 발굴 시 조선 시대 건축물 유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도감 터를 다른 곳으로 옮겨 재현했다고 하지만, 역사적 시설은 그 자리 자체가 중요한 법이라 씁쓸한 감회에 젖게 한다.

동대문유구전시장과 붙어있는 동대문역사관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출토된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 조선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유물 1천여 점이 전시돼 있다. 이렇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관람은 끝난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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