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12] 허창무 주주통신원

운동장 안, 불완전하게 복원된 멸실구간의 성곽은 산책로로 조성돼 공원 밖으로 이어진다. 그 길이가 123m나 된다. 이 구간은 동대문축구장이 있던 자리이므로 어설픈 복원구간은 동대문축구장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복원된 성곽은 공원 밖에서 왕복 4차선 도로와 만나서 끊어진다. 길 건너편은 한양공고 담장이다. 본래의 성곽은 아마도 이곳에서 광희문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을 것이다. 옛 경성도(京城圖) 를 보면 이곳에 치성이 있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향으로 100m쯤 가면 2009년 문을 연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홍보관이 있다. 홍보관 건물을 지나 광희문 쪽으로 간다. 왕복 6차선의 왕십리길을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옛 서산부인과 건물이 보인다. 한국이 낳은 걸출한 건축가 고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한 건물이다. 그가 설계한 건물마다 한국의 전통미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한국 건축계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한국의 르코르뷔지에라는 별명을 가진 김중업. 1922년 평양출생.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1941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서 세계적인 건축명장 르코르뷔지에를 만난다. 그에게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그이 건축연구소에 들어가 1955년까지 3년간 사사한다. 1956년 귀국 후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성장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설계도를 받아든 서산부인과 원장이 물었다. “산부인과 건물이라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자궁을 모티프로 설계했습니다. 건물의 램프 부분은 남성의 성기이고, 각 실은 여성의 자궁 형상입니다.” 김중업의 설명에 서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작 시공에 들어가면서 설계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건축술로는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건물 옆으로 있는 건물들 사이에 불길에 그을린 듯 시커먼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성곽이 끊긴 것은 애석하지만, 앞으로 성곽 복원에는 귀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기에 위안으로 삼는다.

여러 이름을 가진 광희문

옛 서산부인과 건물 부근에서 왕복 6차선 왕십리길을 건너면 광희문에 이른다. 광희문은 혜화문과 같이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문루가 퇴락해 헐렸다. 홍예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해체해 15m 남쪽으로 옮겨서 다시 쌓았다. 그때 문루도 복원했다. 그러니까 일제가 철거한 혜화문과 달리 광희문은 우리가 철거했다. 조선시대 일본 사신은 두모포 나루(豆毛浦, 현재의 옥수동)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일제는 그들의 사신이 출입했던 성문을 보존하기 위해 전차 궤도를 개설하면서도 광희문만은 허물지 않았던 것일까?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는 광희문은 속칭 남소문으로 알고 있으나, 현재의 장충단길 언덕에 별개의 남소문이 있었다. 그것이 도둑들의 출입이 빈번하고, 도둑들과 수비대의 싸움으로 인명피해가 많다는 이유로 예종 1년(1469)에 폐쇄됨으로써 남소문은 자연스럽게 광희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됐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 5년(1396) 건립 후부터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이곳 부근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왕조실록에 5대왕인 문종 때부터 19대왕인 현종 때까지 광희문이라는 기록은 단 한 건도 없고, 20대 숙종 때에 와서야 광희문의 이름이 나온다. 실제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의 축성양식도 숙종시대의 것으로 보아 광희문 문루의 중건공사도 그 당시에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광희문은 소의문처럼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리었다. 실제로 도성 안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게 살해된 백성들의 시체를,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의 순교자들을, 19세기 후반 1886년 무렵에는 콜레라로 죽은 사람들을,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죽은 군인들을, 그리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될 때는 일제 군대와 싸우다가 죽은 조선 군인들을 이 문 밖으로 내다 버렸다. 일제강점기에 광희문 밖 신당동 일대가 주거단지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지방 사람들이 누군가 한양으로 올라간다고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오라’고 부탁했다. 지독한 병에 걸리거나 고난을 겪다 시구문에서 죽은 사람들 때문에 그 성돌이 굳건히 면역돼 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이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겠다. 19세기 후반 한양도성 안에도 콜레라가 창궐했다. 콜레라 환자가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광희문과 소의문으로 나갈 때였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어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이 하루는 광희문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아이들이 문밖에 버려진 참혹한 광경을 보았다. 그녀는 조선인 안내원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왜 성문 밖에 버려졌습니까?” 안내원이 대답했다. “콜레라에 감염된 아이들입니다. 거의 죽게 돼 성 밖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스크랜턴은 망연자실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집에서 치료해야지 왜 성 밖으로 버립니까?”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 아이를 데려와 치료했다. 병이 나은 그 아이는 이화학당에 다녔다. 이화학당의 초기 학생들은 주로 그런 아이들이었다. 이렇듯 광희문은 그 이름처럼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 있었던 문이 아니라 망자를 뒤따르는 곡소리와 상여꾼들의 장송곡이 끊이지 않았던 음침하고 우중충한 문이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 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처음 계획은 숭례문으로 나가 강화도로 가려했으나,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군대가 이미 양철평(良鐵坪, 지금의 녹번동)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강화도로 가는 도중 청군에게 붙잡힐 것 같았기 때문에 대문으로 나가야하는 임금의 품위나 체면에도 불구하고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인조 14년(1636) 12월 14일의 기사를 보면 이때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임금이 탄 수레인 대가(大駕)가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임금은 남대문 문루에 올라 문밖에 진(陣)을 치도록 병조판서 신경진에게 명했다. 그때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적진으로 들어가 오랑캐의 상황을 살펴보겠다고 청하니, 임금은 그를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도록 명하였다. 그런 다음 임금은 수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낙산 구간 해설 완료. 다음 글부터 남산 구간 해설이 시작됩니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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