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하옥되자 구명운동 후 고향에서 의병을 창의(倡義)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하옥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을 알아보고자 당시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의 기사를 찾아 이를 기록해본다.

이순신 장군의 하옥 과정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 2월 1일 임술 1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키라 명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다.

전략상이 황신(黃愼)을 보내 순신에게 비밀히 유시하였다. 그러나 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戰艦)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거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가등청정이 과연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 왔다가 그대로 서생포(西生浦)로 향했는데, 이는 실로 행장과 함께 작은 군사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을 들어 순신을 하옥시켜 고신(栲訊)하게 하고, 마침내 전남 병사(全南兵使)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 2월 4일 을축 1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율에 따라 죄를 정할 것을 사헌부가 건의하다.〈너무 긴 무장이기에 요약하여 기록한다.〉

“이순신은 남의 공로를 빼앗으려고 기망하여 장계를 올렸으며, 적선이 쳐들어 왔는데도 오히려 한 지역을 지키거나 적의 선봉대 한 명을 쳤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뒤늦게야 전선을 동원하여 나오다가 적의 활동에 압도되어 적을 토벌하지 않고 놓아 주었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한 죄가 크오니 잡아오라고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 하소서”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한다.

사헌부에서 사실의 진위를 파악 하지 않고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달린 이러한 엄청난 건의를 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러나 눈이 멀고 중심을 잡지 못한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 2월 6일 정묘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김홍미에게 전교하다.

김홍미(金弘微)에게 전교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元均)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 이순신 장군 호송 장면(캡처)

이순신 장군의 구속은 1597년 2월 6일 선조의 체포령으로 2월 26일 압송되어 3월 4일 의금부에 수감 되었다.

▆전방삭 장군은 이순신 장군 구명 활동에 나섰다.
오호라!, 이일을 어이 할꼬!. 전방삭 장군은 하늘의 무심함에 통곡 하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전방삭 장군은 백방으로 구명 활동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수군 장병들과 좌수영 관할 백성들이 억울함과 무죄를 하소연하며 외치는 함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전방삭 장군은 의금부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이순신 장군의 하옥은 부당하고 억울함을 호소 하였다. 이에 동참한 분으로는 정철(丁哲), 송희립(宋希立), 황대중(黃大中), 정경달(丁景達), 변홍원(卞弘原), 변홍주(變弘州)등으로 이순신 장군의 석방을 건의 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참조)

고위직의 구명활동도 활발했다.

∎정경달(鄭景達 : 이순신의 종사관)은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정승에게 내막을 자세히 보고하자 이원익 정승이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듣지 아니 하였다. 공은 서애(西厓) 유성룡, 백사(白沙) 이항복에게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진언 하였다.(반곡집盤谷集 참조)

∎유성룡은 직접 나서면 오히려 선조의 노여움을 살까봐 이순신의 가족이 전해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를 은밀히 우의정 정탁(鄭琢)에게 자료를 넘겨주어 읽어보게 하였다. 우의정 정탁이 자료를 읽어보고 자기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후회하고 이순신의 충성에 감동되어 선조임금께 이순신의 구명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우의정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즉 구명상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전서 3권 참조)

▲ 우의정 정탁 신구차 초고(충무공 이순신 전서 캡처)

그때 당시 선조임금의 생각을 알아보자.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3월 13일 계묘 2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이순신에게 벌하는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다.

"이순신(李舜臣)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모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하였다.

▆전방삭 장군은 고향에서 의병을 창의하다.
조정의 분위기를 감지한, 전방삭 장군은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 300명을 모집하여 정예병으로 훈련하였다.

전방삭 장군은 10여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하소연 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생각을 달리했다. “나의 목숨이 다할 때 까지 의병을 창의하여 나라를 구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좌수영의 생활을 정리한 뒤 고향인 보성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전후 사정으로 보아  1597년 3월 중순경으로 짐작 된다.

맨 먼저 보성군수 종친 전백옥(全伯玉)을 찾아 결심한 바를 이야기하고 병기와 군량미를 협조 해줄 것을 당부한 뒤, 지역의 유지 분들께도 뜻을 전하고 본가에 들려 백미 50석을 헌납하니, 이를 본 유지와 일가친척들이 잡곡을 합하여 100여석을 헌납 하여 이를 군량미로 확보하고 의병 300명을 모집 하였다. (보성문화 15권 참조) “군량미가 부족하자, 전방삭 장군의 전 재산을 헌납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의병 훈련지로는 미리 보아 두었던 보성군 벌교읍 영등이다. 이곳은 바다와 접한 야산지대로 전남 여수에서 고흥으로 이어진 여자만인데 벌교로 향하는 길목에서 영등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바다가 산과 산이 거의 맞닿아 병목처럼 되어 있어 그 안쪽은 눈 여겨 보지 않고서는 찾기 힘들어, 의병의 전선과 병사들의 진지를 발견하기 어려운 요새지였다.

▲ 전방삭 장군 의병 훈련지 벌교 영등

전방삭 장군은 보성군에서 의병을 모집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보성군은 의향의 고장이라 불린다.

전방삭 장군 의병 창의 이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朴光前)은 임계영(任啓英)·김익복(金益福)·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 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從事)로 삼고 장자인 박근효(朴根孝)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判官)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박광전 [朴光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제공)

박광전과 임계영이 대규묘의 의병을 창설했고 최대성도 의병을 창의하였기에 이미 열혈 청장년이 많이 의병에 참가한 뒤여서 의병을 모집하는데 애로가 많아 의병수가 소규모가 될 수밖에 없었고, 시대적인 형편으로 군량미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통의 의지로는 이를 운영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전방삭 장군은 훈련원에 근무하면서 병사들의 훈련경험이 많기에, 누구보다 의병을 정예병으로 훈련 하는 데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당시 다른 조직의 의병훈련은 거의 못한 상태였고 오직 관군만이 정규 훈련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를 감안했을 때 전방삭 장군의 의병은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전투에서 3회에 걸쳐 승리하였고, 이듬해인 1598년 6회에 걸쳐 승리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투 상황들은 다음에 밝히겠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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