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全方朔은 이순신李舜臣과 친구가 되다.

전방삭이 성장하여 21세가 되던 해(1566년)의 보성군수는 방진(方震)이었다.
방진이 보성군수로 재임한 기간은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없다. 어느 역사학자는 1558년 전후라 주장하고 있고 ⌜보성군사 선인의 자취⌟에서는 “선조 대?”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정맹남(鄭孟男) 군수가 명종 대 “1561년 8월 참람한 행동으로 파직 되었다”라는 기록을 찾았다. 후임으로 김충렬(金忠烈) 군수가 부임했고 그다음이 방진(方震) 군수이다. 당시의 군수 재임 기간은 각기 다르지만 평균 잡아 2~3년으로 계산하면 방진군수의 취임은 1564년에서 1565년으로 추정 된다. 그렇다면 전방삭이 21세 때 보성군수가 방진이라는 확신이 가고, 다음에 구전을 기록한 전방삭과 이순신의 관계로 보아, 더 확실해 보인다. 

▲ 방진과 그의 딸 방수진

방진의 딸 방수진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화적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화살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외동딸 수진이 순간적으로 꾀를 내어 배틀 도투마리의 뱁댕이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양 다락에 힘껏 내 던지면서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라고 소리 쳤다.
화적들은 명사수인 방진이 아직도 많은 화살이 있는 것으로 알고 놀라서 도망갔다. 이토록 방진의 딸 방수진은 영특하였다.

방진군수 외동 딸 이름은 태평(太平), 덕산(德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400여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노기욱 박사가 발견한 방진의 가계보에서 방수진(方守震)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학자들 간에 구구한 해석이 있기도 하다.

                           ▲ 방진 가계보

그가 성년이 되어 결혼할 때가 되었다.  귀한 딸이기에 딸의 장래를 생각해 신랑감을 찾는데 많은 고민을 하였다. 방진과 동문수학한 동고(東臯) 이준경(李浚慶)이 그동안 눈여겨 보아두었던 이순신(李舜臣)을 중매하여 사위로 삼게 되었다.
가문과 인품으로 보아 사위로 삼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순신은 21세에 방수진과 결혼 한 뒤 명궁으로 이름난 장인의 권유로 무예를 익히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이순신의 꿈은 학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장인의 권유를 받고 마음이 변했다.
이 일을 두고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보면 하늘의 뜻이였는가 싶기도 하다.  
당시 보성 지역의 사정은 소 도읍으로 활터와 경마장이 한 곳씩 밖에 없었다. 그러하기에 매일 같이 드나들던 전방삭은 처음 보는 이순신과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

(방삭) “처음 뵙는 분인데 어디에 사십니까?”
(순신) “저는 방진군수 사위가 된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방삭) “소문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 고을에 사는 전방삭 이라고 합니다.”
(방삭) “또래쯤 되어 보이는데 몇 살이십니까?”
(순신) “21세, 을사 생 입니다.”
(방삭) “그래요 저와 동갑이군요. 더 반갑습니다. 그러면 생일은 언제쯤 인가요?”
(순신) “저는 3월 8일에 태어 낫습니다.”
(방삭) “저는 3월 15일생입니다.”
(순신) “태어난 해와 달이 같고 겨우 7일 상관이니 이런 인연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이러한 인사를 나누고 부터 매일 같이 만나게 되어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후일 임진왜란을 맞아 전방삭 장군과 이순신 장군은  “같이 싸우고 같이 죽기를 맹세한 사이이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이공순신동순제공사실(忠武李公舜臣同殉諸公事實)⌟과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등에 동순절자(同殉節者)로 기록 되어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순신은 방수진과 결혼 후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으로 남은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11년간을 보성에서 살았다 한다. 방진 또한 방씨 일가친척들이 보성에서 많이 살고있어 한때 보성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하고, 이순신의 외가 어머니 집안 초계변씨(草溪卞氏)들이 보성 회천에 많이 살고 있기에 어느 정도 수궁이 가기도한다.  
 
전방삭과 이순신은 가끔 말을 달려 보성의 명승지를 찾기도 하고 산과 들을 두루 살피며 바닷가를 찾아 낚시도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전방삭과 이순신은 명문가의 자손들로 학문을 익혔으며 무예를 기르는 과정이기에 서로에 대한 예를 중시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이 통하여, 이순신은 타향에서 좋은 벗 전방삭을 만난 것이 즐거웠고, 전방삭 역시 이순신을 만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처지였다.

활 쏘는 친구

후일 이 두 분이 국가의 위기를 막아내는 큰 힘이 되었음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그러나 전방삭 장군은 조선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선정하고 록권(錄券)을 하사하였으나 후세에 그 공적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어 아쉽게 생각한다. 
 
정형남 작가는 전방삭 장군 역사소설 ⌜꽃이 지니 열매 맺혔어라⌟에서 이렇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역사는 뿌리의 근원이기에 깊이 들여다볼수록 새롭게 다가오며 가슴을 여미게 한다. 조선조는 내외우환 속에서도 태평한 시절을 살아오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찍이 맛보지 못한 굴욕을 당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방삭 장군에게 ‘우리가 다 같이 한 마음으로 죽기를 맹세하고 전쟁을 막아내자!’ 라고 하였습니다. 벌교포, 고흥 망저포 첨산, 보성 왜교 안치산 죽전까지 쳐 들어오는 왜적을 막아내는데,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 장군은 약속처럼 전장에서 목숨을 다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기개 높은 우국충절과 꽃처럼 산화한 순절은 가슴 뜨겁게 한다. 구국 충절일념으로 일어선 의병들. 특히 보성, 고흥, 장흥, 순천등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은 청사에 길이 남을 충절이었다.
역사의 기록물들이 대게 그렇듯 일방적이다 싶게 최상위의 인물위주의 기술이어서 그 하층위의 인물들은 소모적인 인물로 채색된 점이 없지 않다. 이제라도 국민 전체가 역사의 주체라는 점을 새롭게 각인 시켰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자 역시 동감하며 이글을 옮 겼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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