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武科)에 급제(及第)후 훈련원(訓練院)에 근무 중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오르다.

전방삭은 그 동안 기른 학문과 무예의 실력을 인정받을 시기가 되었다. 선조 을해(1575년)당시 나이 30세에 무과에 급제 후 조선 관군 훈련 기관인 훈련원에 채용되었다. 맡아본 임무는 습독관(習讀官)이었다. 습독관의 임무는 병사들의 무술 연마와 병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단계를 거친 승진으로 1592년 부정(副正) 건공장군(建功將軍 종3품. 현: 군 준장급)에 이르게 되었다. 이의 증거는 1605년 선조임금께서 하사하신⌜선무원종공신록권⌟ 첫 장에 ⌜부정(副正) ⌜전방삭(全方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준장급 인원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도 감안하자.

▲ 선무원종공신록권 첫장

당시 훈련원의 구성 체계를 ⌜경국대전⌟에서 살펴보면 지사(知事 정2품) 1인, 도정(都正 정3품 당하관) 2인, 정(正 정3품 당하관) 1인, 부정(副正 종3품) 2인, 첨정(僉正 종4품) 2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참군(參軍 정7품) 2인, 봉사(封事 종8품) 2인, 습독관(習讀官) 30인 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관으로 임용 되었다.

장순의 위상(캡처)

일본의 음흉한 야욕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에 일본이 우리나라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가 영주들과 전쟁에서 차례로 굴복시켜 일본을 1587년 통일 한 뒤 아시아 전체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먼저 조선에 수교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명나라를 정복 할 터이니 일본군이 조선을 통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정명가도(征明假道)이다.

하지만 명과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이 이런 요구를 들어줄리 없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거절되자 풍신수길은 20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아보자.
정치하는 자들이 당파 싸움으로 동인, 서인 당파로 나뉘어 당리당략을 노리고 분탕질이 벌어진 시기이다. 심지어는 일본을 정탐하려 보낸 사신도 파벌적으로 보고내용이 달랐으니 조정은 중심을 잡기가 혼란스러웠다.(조선왕조실록 선조편 참조)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이미 국력을 기르자고 이이(李珥)께서는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을 주장 하였으나 이 또한 당파적인 견해로 묵살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일본의 침략을 감지한 조정에서는 늦게나마 대비책을 강구 했으나 이 또한 많은 벽에 부딪치는 실정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영 절도사로 임명하는 일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결국 1592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군이 쳐 들어오고 말았다. 이를 막아낼 힘이 부족한 우리 조선은 순식간에 국토를 점령당하고 말았다.

▲ 일본군의 공격

선조임금은 왕실의 위급함을 알고 피신하게 된다. 전방삭 장군은 광해군 세자를 호종(扈從)하는 임무를 맡았다. 산 넘고 물 건너며 밤이슬을 맞는 괴로운 피신이었다. 백성들은 저버려두고, 왕가만 피신하는 처사에 분개하여 궁궐을 불 지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 피난 길에 오른 선조의 어가 행렬

관군들이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뜻있는 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각처에서 항전 하였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고경명·조헌·김천일·김면·정인홍·정문부·이정암·우성전·권응수·변사정·양산숙·최경회·김덕령·유팽로·유종개·이대기·제말·홍계남·손인갑·조종도·곽준·정세아·이봉·임계영·고종후·박춘무·김해 등을 들 수 있다. 잊지 않고 깊이 새겨두어야 할 고마운 분 들이다.
위에 기록한 분들은 의병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전투 범위가 제법 큰 규모로 활약 한 분들이다. 그러나 전원이 큰 성과를 올렸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라를 구하자고 나선 의병장들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각처에서 향리를 지켜내고자 활동 하신 분들이 수없이 많다.

의병을 모집하는 의병장들은 대 규모의 의병을 바랬지만 군량미의 확보가 수월한 시기가 아니기에 소수의 정예병을 기를 수밖에 없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후세인들은 애국충절 정신을 가볍게 여기고 소규모로 활약 한 장군들은 이름조차 기록이 없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 한다. 당시의 전적을 살펴보면 소규모의 의병장들이 오히려 핵심 있는 큰 공을 세운 분들도 많았다는 사실도 상기해 보자. 이에 속한 분 중 어모장군 전방삭이 있다.

다음기회에 더 자세히 기록 하겠지만 전방삭 장군은 향리를 지키는 전투만 한 것이 아니다. 광해군 세자의 윤허를 얻어 관직을 버리고 이순신 막하로 달려가 이순신 장군과 함께 2차 출동부터 참여하여 7차 출동까지 이순신의 군무를 도와 많은 전투에서 승전한 뒤, 이순신 장군이 누명으로 하옥되자 병영이 와해되어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기에 뜻 한바 있어 귀향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향리와 인근 지역까지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기록은 ⌜호남절의록⌟, ⌜광주•전남 충의사록⌟에 개괄(槪括)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보성군의병장 전방삭⌟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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