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전방삭 장군은 병참관련 군관과 함께 병참 확보 길에 나섰다.

조선수군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이 늘어나서 늘 군관과 군졸들이 부족하였다. 전방삭 장군은 남다른 회안에 잠겼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1596년 윤 8월 13일 부터 육지로 병참 확보 길에 나섰다. 이순신 장군과 병참관련 군관, 그리고 전방삭 장군은 군량확보를 위하여 출동한 것이다.

먼저 이동 경로를 살펴본다.
본영  → 광양 → 순천 → 낙안 → 고흥 → 보성 → 장흥 → 강진 → 완도 → 해남 → 강진 →해남(우수영) → 강진(성전) → 영암 → 나주 → 무안 → 함평 → 영광 → 전북(무장, 고창)  → 장성(장성현) → 진원 → 광주 → 화순 → 능주 → 보성 → 낙안(2차) → 순천 →여수 → 한산도진중

1596년 윤8월 13일 부터 10월 10일 동안 두 달여의 긴 여정이었다. 이 여정에서 1차적인 목표는 병력 동원과 군량미 확보였으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실정이어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수고한 보람이 있어 병력이 보충 되었고 군량미도 약간은 확보되었다. 이들은 병력과 군량미 확보 외에 순회지 마다 병기의 확보 상황, 병사들의 후생관리, 각 지역의 방비책등을 점검하고 잘한 점은 칭찬하며, 부족한 점은 시정을 권유하는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 군량미 확보 장면(보성 방진관 제공
▲ 이순신 장군이 자원 입대자를 정렬하는 모습(보성 방진관 제공)

순회 중 특이한 사항을 요약 정리해 본다.
∙이순신 장군 일행은 순천부에 도착하여 업무를 보고, 조총을 만드는 군관 정사준(鄭思竣) 집을 찾아 유숙하였다.

∙이순신 장군 일행은 낙안읍성에 들려 이호문(李好問), 이지남(李智男) 등을 불러 수군의 전함 건조에 따른 난제를 점검 하였다. 후일 낙안 절의인물로 ⌜호남절의록⌟에 전방삭(全方朔), 이신수(李信守)를 거론하였다. (전방삭은 보성 출신인데 낙안으로 기록된 사연은 다음에 밝히겠다.)

∙고흥 도덕면 도덕리 도양 둔전에 들려 농사일과 군량 수급계획 등을 살펴보았다.

∙완도 가리포진 남쪽 남망봉 해발 150m 망대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전라도의 주요 요충지이기에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해남우수영은 군졸 1,085명을 보유(⌜전남우수영지⌟의 기록) 하고 있는 중요 지역이기도 하지만 울돌목의 요충지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영암에서 이순신 장군과 서신을 주고받은 현건과 현덕승을 만났다. (후일 복사본의 서신이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편지글 가운데 이순신 장군이 쓴 내용중 “곰곰이 생각하건데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습니다(절상호남 국가지보장竊想湖南國家之保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이 전하고 있다). 정상(鄭詳)은 아들 정여린(鄭如麟)과 종손 정란(鄭瀾)을 시켜 쌀을 이순신 장군 군진에 보냈다.

∙보성에 들려 관군의 장비며 운영상황을 점검 후 열선루에 들렸다. 이곳 열선루는 이순신 장군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수군의 재건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 현장이며, 1597년 8월 15일 선조임금의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편입하여 싸우라”는 명을 받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므로 힘을 다해 싸우면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장계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여수 고음내에 도착하여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만났다. 공무 일을 마친 뒤, 어머니를 고음내에서 여수 본영으로 모시고와 일행과 더불어 종일토록 어머니를 즐겁게 모셨다.

긴 여정을 마치고 한산도 진중으로 돌아왔다. 전방삭 장군은 이순신 장군 행군 부대에 합류하여 병참수집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나라를 위해 몸 바쳐 백성들을 구하고 적을 토벌하기위한 우국충정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이었다.

“전방삭 장군은 평소 이순신을 도와 전라도 지역을 돌며 군사, 군량, 군기, 군선 등 병참물자를 확보하였다.”라고 한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은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에서 발췌 요약하였다.  
 
여기에서 필자의 의아심을 토로코자한다. 이순신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인물에 관해서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연구를 한답시고 ⌜김경수 편저. 난중일기⌟. ⌜설중환 역. 난중일기⌟. ⌜박혜일, 최희동, 배영덕, 김명섭공저 이순신의 일기⌟. ⌜김흥식 옮김. 징비록⌟. ⌜박기봉 편역. 충무공이순신전서⌟등을 읽어 보았고. 전방삭 장군의 공적 기록이 적혀있는⌜천안전씨대동보⌟, ⌜호남 절의록⌟, ⌜광주•전남 충의사록⌟, ⌜선무공신 추모록⌟등도 보았다. 그런데 후자에 적은 책들에는 개괄적이지만 “전방삭 장군이 이순신 막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라고 적혀있고, 종중에 전하는 구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현재의 역사학자도 여러 행적을 검토해 수긍하고 있다.

420여 년 전 당시 문맹의 시대인 탓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 헌병이 전방삭 장군의 유품을 빼앗아 가고 집까지 불 지른 일로 증거자료가 부족함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전방삭 장군 본인의 증거 자료가 미흡한 점에 후손들의 아픈 가슴을 행여라도 후벼파지 마시고 너그러운 이해를 당부 드린다.

▲ 필자가 참고한 서적

이순신 난중일기에는 전방삭 장군은 등장하지 않았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이 뿐만 아니라 이순신장군과 밀접한 관계였고 큰 공을 세웠다는 “승려 박대복(朴大福)은 이순신장군께 군량미 2,000석을 지원하고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워 사복시부정(司僕侍副正)에 올랐다”하는 분도 기록이 없고, “자운(慈雲)도 이순신 휘하에 큰 공을 세우고 이순신 사후에 정미 600석으로 수륙제를 지냈다”는 분의 기록도 없을 뿐더러, “옥형(玉炯)은 군량미를 대고 자못 이순신의 신임을 얻었다”하는 분의 기록도 없다. 어인 일일까?

이러한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간주하나, 조사하여 발표하기에는 필자의 여력이 미치지 못한 점 안타깝게 생각한다. 다음에 ⌜이순신 난중일기 분석 편⌟에서 자세히 밝혀 보겠다. 

여기에서 잠깐 언급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난중일기에 등장한 인물은 명나라와 일본인을 제외한 조선인은 총 987명(필자가 조사한 명단과 직책, 등장 횟수, 공훈 등을 기록한 문서)인데 그중 종의 신분으로 등장한 수는 62명에 달한다. 여기에서 또 의아스러운 것은 전방삭 장군의 종 한경(漢京)은 전방삭 장군과 같은 마을(보성군 우산리 택촌)에서 나고 자란 후배이며, 한경이 어린 시절 배고파 울고 있을 때 전방삭이 식량을 도와준 사이라 한경을 잘 알고 있다.

전방삭 장군은 이순신 장군께 가끔 한경을 심부름으로 보냈다. 그런데 난중일기에  전방삭 장군의 이름은 등장된 바 없으나, 종 한경의 이름은 6회나 등장한다. 이를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난감(難堪)하다. 420여 년 전의 일이기에 더욱 난감하다. 필자의 심정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그러나 앞 세대 학자들의 기록이나, 같이 싸웠던 장수들의 기록(다음에 증거 자료 제시 계획임)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 관하 전라좌수영에서 군무를 도와 같이 활동한 것은 확실하다.

더 확실하고 자세한 기록을 찾아 전방삭 장군의 행적과 공적을 떳떳하게 제시코자 노력하고 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신 분 가운데 전방삭 장군의 행적이 기록된 고서를 소장하거나 보신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백배 후사하겠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