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사 7

- 3.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 지지 투쟁 3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4.02l수정2020.04.03 04:52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교조 사수 투쟁 와중에서 발생한 학생 투신 국면은 투쟁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단식농성과 철야 동조 농성에 대해 6/14일자로 무조건 농성을 해제했다. 농성 해제는 비상회의에서 내린 전교조 구로고 분회 전체 조합원의 의사결정이었다. 무엇보다 격앙되고 흥분된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단식 농성 당사자인 양달섭 선생님은 무조건 농성 해제 결의 사항을 전달했을 때 처음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생회장) 호철이가 크게 다쳤는데 나의 단식을 해제할 수 없다. 호철이가 병원에서 가슴을 아파하면서 '선생님 끝까지 싸워 꼭 이기세요!'라고 한 말을 저버릴 수 없다"며 "나도 죽을 때까지 무기한 단식을 하겠다."고 버텼으나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선 조직의 명령으로 단식을 통한 항의 농성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그러자 양달섭 선생님은 단식을 철회하고 이튿날 6/15일 오전 11시에 고대구로병원 557호실을 방문해 류호철 군(학생회장)을 위로하고 호철 군 아버지께 사죄하였다.

6/15일엔 전교조 구로고 분회 운영위 회의와 6/17일엔 확대운영위 회의를 열었다. 구로고 분회 활동의 당면 과제로 ① 소식지 발간과 지역주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여 전교조 활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홍보물 제작과 ② 투신 학생에 대한 성금 모금, 그리고 ③ 양달섭 선생님 생계 보조, ④ 직위해제에 따른 수업결손대책으로 시간강사 요청, ⑤6/13, 14, 15, 16일 계속된 일부 학부모와의 대담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하였다.

투신 국면이 지속되는 와중에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대회가 6/15일 서울대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애초 예정지였던 건국대엔 정・사복 경찰 19개 중대 병력 3,000여 명을 배치해 부득이 집회장소를 변경해서 치렀다.

▲ 1989년 6/15일 경찰을 따돌리고 서울대에서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성사시켰다. (출처 : 오픈 아카이브)

경찰은 건국대 이외 결성대회 장소로 세종대와 한양대를 예상하여 미리 13개 중대 병력 2,000여 명을 함께 배치해 놓았다. 아마도 5・28 전교조 결성대회에서 허를 찔린 것에 대한 학습효과였다. 그러나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대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인 서울대에서 치러졌다.

필자는 집회 장소 변경 소식에 따라 대림역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당산역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뒤늦게 약속 장소가 아닌 걸 깨닫고 서울대로 향했다. 필자가 서울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경들이 서울대 정문을 봉쇄한 상태였다. 필자는 어둠을 틈타 관악산 쪽으로 기어들어가려다 마음이 약해져 포기했다. 그리고 뒤늦게 함께 출발한 다른 교사와 결성식 집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서울지부 결성대회가 끝난 이후 서울대 정문으로 나오던 교사들을 전경들이 막아서며 불상사가 발생했다. 전경들은 방패로 내리찍으면서 서울대 학생과 전교조 교사 13명에게 중경상을 입혔고 364명을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울지부 결성식에 참가한 김승만, 이인곤, 양달섭, 김주영, 이서복, 강경구, 송인석, 윤석룡 선생님들은 다치질 않았다.

서울지부 결성대회에 이어 이튿날 6/16(금)에는 전교조 서울지부 강서남부지회가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결성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양동중학교(강서구 등촌동 소재) 교사 박병배 선생님이 초대 지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강서남부지회 결성식 바로 다음날 박병배 선생님에게 국가공무원법 위반죄를 적용해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그만큼 전교조 결성 초기 6월에는 공안정권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 학교 안팎으로 상황은 엄중했고 `교원노조 사수' 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교조 사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만큼 구로고 분회 투쟁기금 또한 늘어났다.

6/17일 현재 이상학 선생님(5만원), 최영철 선생님(10만원), 이인곤 선생님(5만원), 양기택 선생님(1만원) 등 총 134만원이 모금되었다. 1989년 당시 20-30대 교사 월급이 50만원 안팎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화폐가치로 600만 원 안팎에 이르는 거액이 짧은 기간 투쟁기금으로 걷혔다. 이는 그만큼 노동조합에 대한 교사들의 열망이 대단했음을 반증하였다.

학생 투신사건 직후 학생 대의원회의에서 결정한 6/15(목) 학생들 항의 집회도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이 설득하고 만류해 항의 시위를 무산시켰다. 그러나 6/15 학생들은 학생비상총회를 개최하여 3가지 요구사항을 결의하였다.

3가지 요구사항은 첫째 6/13 집회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했음을 학교당국은 인정할 것과 둘째 6/14 학교당국의 일방적 휴교조치에 대해 해명할 것, 그리고 셋째 6/13 학생회 간부의 투신사건에 대해 학교장의 해명을 촉구했다. 3가지 결의사항을 요구하며 학생들은 6/16 5교시 C.A 시간에 교내 집회를 열겠다고 학교당국에 통보했다.

이튿날 6/16 학생대중들은 전날 학교당국에 통보한 대로 운동장에서 항의집회를 열어 투신에 대한 학교장의 책임 있는 답변을 촉구했다. 그러나 학교장은 학생 투신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면서 해명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크게 반발했다.

학생들이 또다시 항의 집회를 강행하려 결의하자 이번에도 조합원 교사들이 나서서 학생들 분노를 진정시키고 집회를 통한 반발을 진정시켰다. 6/16(금)에도 학생들은 격분하였으나 전교조 교사들이 내내 설득하여 학생들 분노를 가라앉히고 해산 후 귀가시켰다.

이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이러했다. 6/16 교내 항의집회에서 학생들은 학생회장과 총무부장의 투신과 일방적 휴교조치에 대해 학교장의 진심어린 해명과 사과를 듣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장이 해명 아닌 해명을 하고 교장실로 돌아가자 2학년 대의원들이 직접 교장실로 찾아가 학교장의 진심어린 해명과 사과를 재차 촉구했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전교조 구로고 초대 분회장인 김승만 선생님이 조합원의 의견을 모아 중재안을 만들어 발표했다. 중재안은 6/17(토) 12시까지 학생비상총회에서 요구한 3가지 사항에 대해 학교장은 서면으로 해명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6/17 학교장은 해명이 없었고 기다렸던 학생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분노를 가슴에 안은 채 귀가했다.

▲ 1989년 6/13일 학생회 간부들 투신 사건에 대해 학생들이 진정어린 사과와 해명을 촉구하며 격렬히 항의하자

6/20일 뒤늦게 학교장이 서면으로 보낸 해명서(출처 : 하성환)

6/20일에 학교장이 서면으로 해명 내용을 통보했다. “학교가 안정되지 못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교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면서도 ‘부덕의 소치’ 운운하며 “서로의 불신의 앙금과 감정을 씻어버리고 상호협조와 화합하는 마음가짐으로 면학분위기 조성” 운운하며 글을 끝맺었다.

학생 투신에 대해 1차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해 학교장은 사과하지 않았다. 두루뭉술 해명 아닌 해명으로 끝난 것에 대해 학생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일단 병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류호철 군을 위해 성금 모금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6/21 H.R 시간 주제를 ‘류호철 군 성금 모금’으로 정해 이를 실천했다.

학생 투신 국면에서 학교당국은 기회주의적이고 표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학생대중의 분노를 가라앉힐 때는 전교조 교사들을 이용하는가 하면 한편으론 권력의 전교조 탄압에 발맞추어 경찰에 고발하는 등 탄압의 일선에서 교활하게도 두 얼굴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6/13 학생 투신 사건에 학교장은 마땅히 책임이 있음에도 투신사건 자체를 전교조 교사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가며 호도했다.

심지어 투신 당일 자정 야심한 밤중에 - 정확히 6/14 0시 30분경 - 학교장은 구로경찰서 경찰 30여명을 데리고 와 구로고등학교 교무실에서 농성 중이던 양달섭, 김승만, 송인석, 이서복, 김주영, 하성환, 윤석룡 선생님 7명 전원을 구로경찰서로 연행했다. 당시 이인곤 선생님은 숙직실에 있어서 화를 피했다.

학교장이 동료교사들을 경찰에 형사 고발한 것이다. 실제로 구로경찰서에서 조사 받을 때 형사들이 고발자는 구00라고 학교장 이름을 불러주었다.

학교당국은 투신한 학생회장의 불행을 악용하여 전교조 교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모면하고 전교조 교사들을 탄압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6/13 투신 당일, 신원 불명의 학부모들 20여 명이 교무실에 난입해 폭언과 난동을 피운 것 역시 학교당국의 태도나 권력의 탄압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은 비상회의에서 이 점을 예견하며 앞으로 펼쳐질 '전교조 사수' 투쟁이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을 예상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관제언론의 왜곡보도를 상당한 긴장감 속에 경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학생 투신 사건은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의 예상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되었다. 그만큼 학교당국과 권력은 음모에 능했으며 교활했고 관제언론은 사실왜곡에 앞장섰다. 그것이 89년 6월, 한국사회 지배집단이 보여준 부끄러운 민낯이었다. 80년대 한국사회 정치권력과 교육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은 공적 기구를 빌어 그들끼리 사익을 추구하는 사악한 패거리 집단이었고 오히려 공동선을 저해하는 반역집단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학생회장의 투신 사건이 발생하자 그날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비상회의를 통해 일체의 항의 농성을 일단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극도로 흥분되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투신 사건이 발생한 만큼,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학생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학습권 회복을 위해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학생들의 항의 집회를 나서서 설득하고 만류했다. 그것이 1989년 6/13 7교시 투신사건 이후 전교조 구로고 분회가 보여준 냉철한 결정이고 실천이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 가운데 정직하게 아이들을 사랑했던 열성적인 교사 이재선, 김주영 두 선생님이 학생들을 위로하고자 스스로 손 편지를 썼다. 병상에서 몇 개월 투병생활로 고생할 제자를 안타까워하며 위로와 용기를 주고자 자필로 쓴 편지였다.

특히 김주영 선생님의 경우, 예전에 투병 과정으로 두 달 넘게 병상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편지를 썼다. 여기에 이재선 선생님과 김주영 선생님의 편지 내용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 <이재선 선생님 편지글>

"主는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所望,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主를 경배하나이다.

사랑하는 호철아, 빨리 완쾌되기를 기도한다. 역사의 시간이 역동적으로 흐르고 있는 요즈음이구나. 병상에 있는 동안 主님께 철저히 투신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말씀과 묵상으로 말이야. 또한 평소에 다 못한 효도를 병상에서나마 다하기를 빈다."             

                  God be with you, 구로고 교사 이재선

 

                    ♣ <김주영 선생님 편지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시편 23편 4절)

호철 군, 그대의 숭고한 의지와 위대한 결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비록 약하고 쓰러져도 결국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며 진리의 길임을 믿기에 외롭지 않고 후회가 없다. 호철 군의 용단은 전교조의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며 인류의 자유 해방에 길이 빛날 것이다. 우리, 먼 안목을 가지고 차분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자.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굴복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따뜻한 정과 동지들이 있다. 우리의 사랑과 사랑의 대상들이 너무나 많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치료에 힘쓰길 빈다."                     

                               1989. 6. 21.

                                 김주영

 

89년 6월 21일 정치권력-교육권력-언론권력들이 야합해서 학생 투신 사건을 왜곡시킨 전말은 이러했다. 6/21(수) 5교시 H.R시간에 이재선 선생님과 김주영 선생님이 류호철 군을 병문안하고자 고대구로병원에 갔었다. 두 선생님은 류호철 군의 아버지를 만나 빨리 완쾌하길 바란다며 위로가 담긴 손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 내용은 두 분 모두 '성경 구절을 인용한 후 너의 행동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빨리 회복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메시지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사악하고 불의한 지배 권력들은 이 가운데 한두 구절을 인용하여 마치 교사가 학생을 사주하여 투신하게 만든 것처럼 호도하려고 시도했다. 심지어 "류호철 군이 죽었더라면 더 좋아했을" 거라는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당시 참교육 논쟁과 함께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던 정치-교육-언론 등 지배 권력의 교활한 음모이자 술책이었다. 그리하여 6/21일 편지가 전달된 오후 늦게 학교당국은 내일 긴급하게 학부모회의를 개최한다고 300석 자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6/22일 학부모 25명이 1층 교무실로 난입하여 “이 새끼, 이 자식이 무슨 교사야!”라며 욕설과 폭언을 퍼붓고 난동을 피웠다. 심지어“ 호철 군이 죽었더라면 더 좋아했을 거 아니야!” 하면서 마치 전교조 교사의 사주로 투신한 것처럼 매도하려고 악다구니를 썼다.

당시 위로편지를 썼던 김주영 선생님을 비롯해 몇몇 선생님들은 비이성적인 언동을 일삼는 학부모들로부터 심한 폭언과 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 후 2층 교무실로 왔을 때 김주영 선생님의 모습은 극심한 충격 그 자체였다. 사실을 왜곡해 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들이 저지른 비이성적인 언동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 깊이 상처를 안은 모습이었다. 그들 난동을 부린 학부모들은 학교당국과 사전 협의를 거친 뒤 전교조 교사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런 뒤에 '구로고 총학부모회'라는 유령단체를 앞세워 <구로고 총학부모회 일동> 이 보내는 편지라며 분회장인 김승만 선생님에게 전달하려고 시도하였다. 김승만 선생님이 이 학부모 단체는 조작된 단체라며 수령을 거부하자 언성을 높이며 또다시 폭언을 퍼부었다.

학교장은 학생 투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전교조 교사의 사주를 받아 학생회장과 총무부장이 투신한 것처럼 여론몰이에 나섰다. 이는 전교조 탄압에 혈안에 되어 있던 89년 6월 정국에서 군부정권엔 탄압의 호재로, 수구 관제언론들에겐 좋은 먹잇감으로 작용했다.

그날 학부모들의 비이성적인 난동이 있었던 날 저녁,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긴급하게 비상회의를 소집해 '학생 투신과 위로 편지' 사건을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지를 깊이 논의했다.

결론은 앞으로 탄압의 강도가 높아질 만큼 관제언론의 망동을 대비해 긴급하게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6/21일 편지 사건이 있었던 그날 저녁 회의를 마친 뒤에 이인곤, 하성환, 김주영 선생님은 양평동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했다. 편지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하고 관제수구언론들이 ‘전교조 교사 투신 사주’ 운운하며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예상되는 만큼, 한겨레가 미리 앞서서 이 사건을 사실에 입각해 기사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전교조 사수 투쟁 과정에서 진실에 입각해 전교조 교사들의 처지에서 보도해준 절대적 우군이었다. 당시 만난 한겨레 기자는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의 사정을 충분히 반영해 주었고 한겨레 신문기사 역시 객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는 마치 전교조 교사가 학생 투신을 사주한 것처럼 기사를 작성했다. 정반대로 중앙일보 신동재 기자의 14면 기사와 너무나 대비가 되었다. 신동재 기자의 경우, 상당히 자세하게 취재하였으며 사회면 기사 또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균형 있게 작성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짜 중앙일보 2면 「분수대」 기사는 류호철 군이 “투신 전 유서 비슷한 편지를 남겼다”면서 ‛위대한 결단“ 운운하며 전교조 교사가 “17살 나이의 세상 풍상을 모르는 철부지나 다름없는” 어린 학생의 투신을 사주한 것으로 맹비난했다. “도대체 누가 선생인지 누가 철부지인지 헤아릴 길 없다”면서 객관적 사실을 자신의 의도에 맞춰 잔인하게 비틀고 전교조 교사를 매도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전교조 교사들이 학교에서 어떠했는지, 그리고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고 어떻게 존중하며 어떻게 사랑했는지 학생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89년 6월 누가 참 언론이고 누가 철부지보다 못한 기레기 언론인지 그것은 30년이 지난 오늘의 역사가 진실을 드러내주었다.

아니, 이미 30년 전에 누가 진실인지 뚜렷하게 증언해 주고 있었다. '전교조 교사 지키기'와 '참교육 지지 투쟁'과정에서 89년 9월 구속돼 1990년 2월 15일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던 어느 고등학생의 최후 진술은 이 점을 명확하게 밝혀주었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진실을 가르쳐주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시며 정의를 몸으로 실천하실 때 우리는 희망에 넘쳤었다. 그러한 선생님들을 문교부와 학교당국이 우리에게서 떼어 놓을 때 우리는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 일어설 수밖에 없었으며...(중략) 선생님을 사랑한 것이 죄인가? 전경의 곤봉과 군홧발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며 ‘너희들은 데모하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의 배후조종자란 말인가! 우리의 참모습을 깨닫게 해주신 선생님들이 자랑스럽다. 선생님들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지 말라! 비교육자라 매도하지 말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웃음이 넘치는 교실에서 사랑하는 선생님과 함께 진실을 진실이라 말하는 참교육,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받는 것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제 눈물을 거두십시오”

구로고 3-7반 곽경태 군이 해직된 역사교사 이인곤 선생님에게 보낸 1989년 당시 편지글도 이를 뒷받침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구로고 3학년 곽경태 학생이 역사교사 이인곤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쓴 손편지 (출처 : 하성환)

                       ♣ <이인곤 선생님께>

"가슴에 쌓인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빈자리에 어떤 낯선 이가 오셨습니다. 언제나 기다리던 국사시간은 이제 자습시간과 취침시간으로 변했습니다. 오늘도 40여 명은 완전히 자고 깨어 있는 아이들조차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언제나 피곤하신 듯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립니다. 저는 이제까지 배워왔던 잘못된 역사의식을 선생님께 비로소 공정하게 저의 판단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언제나 진지하시고 절규하시는 듯한 모습은 언제나 저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언제나 꿋꿋하시고 옳은 것은 언제나 옳다는 그런 모습은 저희에게 정말 교육이 되었다고 확신하고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다시 뵙게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 아이들도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영원히 저희의 스승이십니다.

추신 : 오늘 선생님을 뵐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약간, 아니 많이 섭섭했습니다."

 

실제로 89년 '전교조 사수(선생님 지키기) 투쟁'과 '참교육 지지 투쟁'과정에서 학생들은 권력의 교활한 분열 책동과 달리, 전교조 선생님들을 아주 좋아했다.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모습부터 자신들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일상적인 학교생활 속에서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참교육, 바로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과 맑고 밝은 영혼의 성숙을 위해 출발한 교사대중조직이다. 89년 교육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당시 전교조는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의 미래를 위한 아이들의 희망으로서 양식 있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놀랍게도 89년 5월 당시 독재정권 하수인 역할에 충실했던 문교부는 교육청에 내려보낸 공문에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명단 공개를 하지 않은 이상, 누가 전교조에 가입해 있는지 알 길이 없고 따라서 탈퇴를 회유할 상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교부가 내려 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엔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발간하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풍물반, 신문반을 만들어 아이들과 어울리는 교사, 교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은 교사….”

구로고 학생들이 투신하면서까지 양달섭 선생님을 지키려 했던 것이나 역사의식에 눈 뜨게 만들어준 이인곤 선생님을 애틋하게 기다리는 남학생들의 모습은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정직한 자기 내면을 표현한 것이자 그 시대 학생들과 양식 있는 시민들이 전교조 교사들에 대해 보내준 일반적 정서였다.

▲ 1989년 10월 28일 전교조가 주최한 <참교육을 위한 국민걷기 대회>에

전국 45개 지역에서 교사, 시민, 학부모 4만 명이 참여하였다. (출처 : 교육희망)

실제로 서초동 꽃동네 공부방에서 방치된 도시빈민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았던 풍물반과 구로고 학생들은 자신들과 함께 서초동 꽃동네 야학을 했던 필자에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불의와 싸우는 것을 두려워 마세요! 우리가 선생님을 지켜줄 거예요!”

그만큼 아이들은 순수했고 정의감이 남달랐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영향이자 87년 12월 대선 당시,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투쟁의 영향이었다. 나아가 88년 4월 총선 당시 구로고 개표부정에 항의하던 학생들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89년 해직 당시 필자가 겪은 또 다른 일화가 있었다. 89년 해직 당시 필자는 2-3반 담임이었다. 여름방학을 지나고 2학기 개학 후 상황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2학기 정부반장 선거가 다가왔다.

9/11일 2학기 정부반장 선거에서 1학기 반장이 2학기 정부반장으로 선출된 친구들 이름과 구담임 이름을 적은 후 2학기 반장으로 하여금 학생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에 학생부에서 해직된 담임을 적었다는 이유로 1학기 반장을 명령불복종 이유로 근신 6일에, 2학기 반장에게는 묵인죄를 적용해 근신 3일의 징계를 내렸다.

그에 대해 이일환 학생이 항의 차원에서'참교육은 이런 것입니다'라는 유인물을 아침 6시 30분에 배포하려다 발각돼 도서실에 13시간 동안 감금당한 뒤 저녁 7시 30분에 풀려나기도 했다.

뒤늦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필자는 자신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아이들이 징계를 당한 것에 대해 너무나 미안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옛 담임 선생님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하성환 객원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주주커뮤니케이션팀  |  전화 : 02)710-0124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이상준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상준
편집위원 : 김경애, 김국화, 김동호, 김미경,김태평, 서기철, 심창식, 정혁준, 허익배   |  객원편집위원 : 김혜성, 박효삼, 안지애, 양성숙, 유원진, 최성주, 하성환
Copyright © 2020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