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사 4

- Ⅳ. 전교조 결성과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약사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3.30l수정2020.04.0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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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27 한양대 잠입과 5・28 전교조 결성

▲ 1989년 2월 2일 전교협('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약칭) 대의원 대회 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고 오종렬 전교협 부회장이 단상에서 발언하고 있고 오른쪽에 고 이규삼 선생님, 왼쪽에 정해숙 선생님 모습이 보인다. 2/2 대의원대회에선 <89년 상반기 중 조직형태를 교원노조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1989년 '상반기 중 조직형태를 교원노조로 전환한다'는 1989년 2월 2일 전교협('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약칭) 대의원대회 결정은 단위학교 현장 활동가들에겐 충격이었다. 실제로 1989년 5월 14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교원노조 발기인 대회를 치르고 군부독재권력의 집요한 탄압이 현실화했다.

문교부와 시도교위에서는 발기인 대회에 참가하는 교사를 징계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당일 연세대 캠퍼스 주변에 장학사와 교감을 대거 동원하는 볼썽사나운 광경을 연출했다.

현장 교사들이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의도였다. 관제언론들조차 보수적인 의식을 대변하듯 '교사가 무슨 노동자'라며 연일 전교조 때리기에 분주했다.

구로고등학교에선 85명에 이르는 교사들 가운데 권력과 주류언론의 장단에 맞춰 흔들리는 교사들이 많았다. 심지어 구로고 평교사나 주임교사 가운데 전교조에 적대적 감정을 드러낸 교사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주임교사는 자비로 교원노조를 비난하는 중앙일간지 칼럼을 여러 장 복사하여 교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또 다른 주임교사는 3학년 수업시간에 전교조를 비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88년 11월 평교사회를 창립하여 89년 새학기를 맞아 평교사회 활동을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갑자기 교원노조로 조직형태를 전환한다는 상부단위 결정은 일반 교사대중들에겐 매우 생경한 소식으로 다가왔다.

평교사회 소속 교사들에겐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는 과중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평교사회 활동에다 교원노조의 절박한 필요성을 홍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교육민주화운동에 과부하가 걸린 탓이다.

그럼에도 구로고 평교사회 2기 집행부는 상부단위 지침에 충실했다. 1989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노동절 전야제 행사가 연세대 교정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구로고 교사 가운데 양달섭, 하성환은 다른 학교 교사 4명과 함께 경찰의 원천봉쇄를 피해 연세대학교 옆 봉원사 쪽 야산을 타고 몰래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잠입 도중 유원지 행락객 차림으로 잠복 중이던 사복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경찰호송버스(일명 닭장차)에 태워져 강서경찰서로 연행돼 있다가 그날 밤 풀려났다.

▲ 1989년 5/14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교조 수도권 발기인대회 장면(출처 : 교육희망)

구로고에서 김승만, 양달섭, 이인곤, 송인석, 이서복, 김주영, 강경구, 김을식, 하성환, 윤석룡, 류은종 선생님 등 10여 명이 참가하였다.

5월 14일 교원노조 발기인 대회에는 구로고 교사들 10여 명이 참여하였다. 서울, 인천, 경기도에서 3,500명 교사들이 발기인 대회에 참가하였다. 전국적으로는 교원노조 발기인으로 서명한 18,000명 가운데 10,000명 이상의 교사들이 각 시도지역별로 발기인 대회에 참가하였다. 서울대회에선 노무현 변호사가 참석하여 전교조를 지지하는 발언을 남겼다. 발언 요지는 "투쟁 속에 잘못된 법이 고쳐지고 그럼으로써 인류 역사는 전진해 왔다"는 내용으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매우 인상적인 발언이었다.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은 교원노조 결성대회일(5/28)까지 남은 기간이 짧았지만 학교현장에 돌아가서 교원노조 건설의 당위성을 쉼 없이 선전하고 홍보했다. 덕분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발기인 서명에 35명 교사들이 지지하며 동참하였다. 비록 선전 홍보기간이 짧았음에도 40%가 넘는 평교사들이 교원노조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구로고 교원노조 준비위원장은 양달섭 선생님이 맡았다. 교원노조 발기인으로 서명한 구로고등학교 교사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송인석, 이인곤, 양달섭, 김승만, 하성환, 윤경태, 이재선, 이서복, 윤석룡, 유대종, 유은종, 이수혁, 신영준, 홍영택, 윤상천, 최영철, 김주영, 문정옥, 이병근, 양기택, 김승수, 김을식, 이상학, 강경구, 문삼석, 조남혁, 박찬일, 강진구, 윤교대, 이성수, 진옥희, 김호순, 이상노, 송호장》 (이상 35명)

1989년 5월 당시 교원노조건설과 관련해 군부독재권력에 종속된 문교부는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사들은 파면, 해임, 면직 조치하겠다고 수차례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당시 교원노조건설을 주도한 전교조 내 핵심활동가들이나 현장 분위기는 과연 그렇게 많은 교사들을 쫓아낼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다.

한 학교에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 20명을, 또는 30명을 과연 쫓아낼 수 있을까? 5・28 전교조 결성대회 당시 전국적으로 6,000명에 이르는 현직교사를 해직시킬 수 있을까? 1989년 7월 6일 현재, 해직을 감수하고 투쟁하는 교사들이 전국적으로 2,700명인데 그 많은 교사들을 해임, 파면시킬 수 있을까?

1961년 군사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4・19 교원노조 관련 교사들 1,000명을 파면시켰다는데 만일 89년에도 그런 상황이라면 교육 쿠데타적 상황이 아니겠는가!

당시 전교조 지도부는 권력의 탄압은 엄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 해직교사는 100~200명 수준, 많아야 400~500명 정도 될 거라고 낙관했다. 공안정국 속에서 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했었다. 현장 교육동지들조차 다들 그렇게 인식하였고 문교부의 해임, 파면조치를 교사를 ‘위협하는 엄포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교원노조 건설 과정에서 군부 독재 권력의 하수인들이 보인 추악하고도 무자비한 탄압이 현실화하면서 현장은 술렁거렸고 교사대중은 움츠러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교원노동조합 건설을 시대의 소명으로 받아 안은 현장 핵심활동가들은 해직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운명처럼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들 단위학교 핵심활동가들은 신명을 바쳐 교원노조 건설에 온힘을 다 쏟았다. 신들린 듯이...

1989년 5월 28일 역사적인 전교조 창립대회 전날, 구로고 평교사회 교사들은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으려 대회 전날 오후, 예정 장소였던 한양대학교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원천봉쇄를 어떻게 뚫고 한양대에 무사히 진입하는가가 내내 고민거리였다.

한양대 정문을 비롯해 캠퍼스로 들어가는 정식 통로에는 전경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아예 모든 걸 차단당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지하철 한양대역에선 내릴 수 없었다.

구로고 교사들 윤석룡, 이인곤, 김주영, 이재선 선생님과 함께 캠퍼스와 인접한 왕십리 전철역에 내렸다. 한참을 걸어서 한양대 캠퍼스 쪽 산기슭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만 공장들이나 음식점을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들어갈 만한 통로로 보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경찰 소대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개구멍을 찾던 도중 기막힌 공간을 발견했다. 한양대로 통하는 산기슭인데 배치된 전투경찰은 없었다. 다만 사유지인 영세한 공장이었다. 무단으로 침입해 공장을 가로질러 산기슭을 올라타야 했다. 그렇게 사유지를 가로질러 냅다 뛰어가면 바로 한양대 캠퍼스 외곽이었다.

우리는 눈에 띌 경우를 대비해 무리를 지어 들어가지 않고 시차를 두고 한 명씩 공장을 가로질러 뛰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산기슭을 향했다. 한 명, 두 명 차례로 진입에 성공했다.

맨 나중에 필자가 공장에 들어갔을 때 지나가던 공장 직원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러자 공장 직원이 무슨 일로 왔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못 들은 체하고 냅다 가로질러 마구 뛰었다. 그리고 야트막한 산기슭을 타고 단박에 뛰어올라 한양대 캠퍼스 가장자리에 접근했다. 성공한 것이다.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캠퍼스로 진입하자 먼저 들어온 교사들과 해후했다. 한양대 원천 봉쇄를 뚫고 들어온 구로고 교사들은 저녁에 합류한 양달섭 선생님을 비롯해 모두 6명이었다. 건국대엔 구로고 교사들 8명이 들어갔고 연세대에도 8명의 구로고 교육동지들이 결성대회에 동시에 참가하였다.

한양대 캠퍼스 개구멍을 찾아 늦게 들어간 필자에게 먼저 들어온 동료교사들이 웃으면서 왜 이리 늦었냐며 면박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구로고 교사들은 전교조 결성대회가 치러지는 역사적인 순간인 전야제 행사를 설레는 가슴으로 맞이했다.

시간이 지나 저녁때쯤 되었을 때 개구멍으로 용케 들어온 전국 각지 전교조 교사들은 한 200명 정도 되었다. 저녁에 학생회관 옥내에서 사전 결의대회를 마치고 밤늦도록 교사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토론을 하며 내일 있을 결성대회를 걱정했다.

5・28 전교조 결성대회 전야제 행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야심한 밤에 한양대 정문 쪽으로 나가봤다. 어둠 속에서 곳곳에 서 있는 경찰병력이 보였고 고요하고 적막한 밤공기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날 밤을 지새웠는지 기억엔 없다.

▲ 전교조 결성대회 전야제가 있던 5/27일 구로고 교사들 6명이 전경들을 따돌리고 무사히 한양대 잠입에 성공했다. 사진은 5/28일 오전에 <전교조 결성하여 참교육 실현하자>는 구호를 목청껏 외치는 장면이다(출처 : 세계일보)

사진 앞쪽 굵은 선으로 표시된 분이 윤석룡 선생님(수학)이고 그 뒤에 있는 젊은 교사가 김주영 선생님(사회), 김주영 선생님 바로 옆에 있는 분이 아이들이 선생님을 '천사'라고 불렀던 독실한 기독교인 이재선 선생님(영어)이다. 김주영 선생님과 이재선 선생님 사이 뒷쪽에 보이는 얼굴이 이인곤 선생님(역사)이고 윤석룡 선생님 옆에 플래카드를 잡고 있는 사람이 필자(국민윤리)이다. 이 사진 자료는 윤석룡 선생님이 보내주었다.

한양대 잠입에 성공한 전교조 교사들은 5/28일 이튿날 결전의 순간을 맞으며 오전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정문 근처까지 행진을 하였다. 200여 교사들은 행진 도중 ‘교원노조가’, ‘참교육의 함성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전교조 결성하여 참교육 실현하자’고 목청껏 구호를 외쳤다. 그날 오후 연세대에서 전교조 결성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본래 결성대회 예정 장소였던 한양대 캠퍼스가 철통같이 봉쇄돼 지도부가 들어오질 못한 탓이다. 제2 결성대회 예정 장소였던 건국대로 장소를 옮기려다 그곳마저 원천 봉쇄돼 상당히 막막한 상황이었다.

▲ 전교조 결성대회 최초 예정지는 한양대였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를 의식해 제2 장소로 전교조 지도부는 건국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은 놀랍게도 제2 장소까지 원천봉쇄하였지만 제3의 장소였던 연세대는 미처 봉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를 찔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6/15일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대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건국대, 한양대, 세종대를 예상하고 전경들로 완전 봉쇄했지만 뜻밖에도 서울대에서 개최하여 성공시켰다.(출처 : 민통련 보도자료, 교육희망)

결국 예정돼 있지 않던 제3의 장소인 연세대 봉쇄를 경찰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밖에서 노심초사 대기하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지도부가 차량을 이용해 재빨리 연세대로 잠입한 것이다. 그리고 30분 만에 결성대회를 치러낸 것이다.

연세대에서 결성대회를 무사히 치렀다는 기쁜 소식이 건국대로, 그리고 한양대로 전파되었다. 30년이 지난 그날의 감격을 전교조 동료 교사들과 함께 평생 잊을 수가 없다.

▲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기습적으로 30분만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교조 교사들 2,000여 명이 결성대회 제2 예정지였던 건국대에 모여 교원노조 결성식을 축하하는 장면이다. 교사대중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지도부 교사들이 미처 들어오질 못했다.

(출처 : 민통련 보도자료, 교육희망)

결국 전교조 결성대회 예정 장소였던 한양대 캠퍼스에 5월 27일(토) 경찰을 따돌리고 잠입했던 구로고 교사들을 비롯해 200명이 넘는 전교조 교사들은 5/28(일) 오후 1시 30분 경 학생회관 3층에서 사복경찰에 모두 끌려나왔다. 한양대 민주광장에 무릎 꿇려 앉힌 채, 전원이 차례차례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져 여러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구금되었다.

한양대 사범대 학생들이 전교조 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져 끝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전투경찰과 장학사들에 의해 사지가 들려진 상태로 끌려 나가는 수모를 겪는 등 거친 연행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농성 중이던 교사들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은 채, 어린 아이들 기차놀이를 하듯이 굴욕적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그리고 전원 여러 경찰서로 뿔뿔이 흩어져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필자는 이재선 선생님과 같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일요일 밤 풀려났다. 어느 경찰서인지 기억조차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내내 한양대에서 있었던 1박 2일 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로고 현장 활동가 교사들은 학교 복귀 후 한양대(6명), 건국대(8명), 연세대(8명) 전교조 결성대회 참가 투쟁을 디딤돌 삼아 구로고 분회 창립대회를 기획했다. 1989년 6월 3일 역사적인 '전교조 분회 결성대회'를 준비한 것이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은 학교의 집요한 방해책동을 뚫고 결성대회를 치렀다. 그런 만큼 감회가 남다르고 구로고 교사로서 자긍심도 컸다. 그 대신 전국 공립 중등학교 가운데 최초로 창립대회를 치른 만큼 공안당국-문교부-시교위-경찰-장학사-학교당국-보수적인 학부모 등 전 방위적인 탄압이 집중됐고 그에 따른 교사와 학생들의 상처 또한 컸다.

 

2. 전국 공립고 최초 6・3 《구로고 분회》 창립 대회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대회는 애초에 6월 3일(토) 시청각실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결성대회가 치러질 경우 교장과 교감이 문교부 – 시교위 등 상급기관으로부터 직위해제를 비롯해 문책성 징계까지 당할 수 있기에 학교 바깥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초대 분회장 김승만 선생님을 비롯해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대회 준비위원 10명(김승만, 양달섭, 이인곤, 송인석, 이서복, 김주영, 김을식, 강경구, 윤석룡, 하성환) 교사들은 비상회의 끝에 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음모를 꾸미듯이 바깥에서 비밀스럽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창립대회를 비롯해 노조활동의 철저한 공개성만이 전교조의 합법성 쟁취 활동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당국의 집요한 방해로 시청각실과 복도가 폐쇄되자 2차 창립대회 장소인 국민정신교육관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어느 순간 자물쇠가 다른 새 것으로 바꿔 버려 결성식 행사가 불가능하였다.

그 시각 학교당국은 학생들을 뚜렷한 이유 없이 귀가를 종용했고 중앙 본관 건물 우측 현관을 폐쇄하려 하였다. 또한 취재 기자들의 교문 출입도 봉쇄해 버렸다. 그러나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대회를 마음으로 지지하던 학생 300여 명이 도움을 줘 CBS 등 취재기자들이 학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 준비위 교사들은 부득이하게 제3의 장소를 물색했다. 제3의 장소인 2층 학생회의실로 장소를 옮겨 개최하려 했으나 학교장은 육탄으로 저지했다. 완강하게 저지하는 바람에 몸싸움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 인정상 포기하고 학교장에게 강력히 항의하였다.

학교장은 굳이 창립대회를 하고 싶으면 운동장에서 하라며 학교건물 내에서는 절대 불가하다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자 노조 분회준비위 교사들은 운동장이야말로 학생들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킬 수 있다고 판단되어 교내 건물에서 할 수 있도록 재차 촉구했다.

결국 '구로고 전교조 분회' 결성 준비위 교사들은 제4의 장소로 본관 1층 교무실로 급히 옮겨 창립대회를 강행했다. 교원노조를 지지한 35명 발기인 가운데 21 명이 참석하였다.

양달섭 선생님이 창립대회 사회를 보며 진행하는 동안 학교장과 교감은 결성선언문과 규약 등 유인물을 찢어버리는 난동을 피웠다. 그런가하면 교무실 중앙 칠판에 붙인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대회》글자판을 잡아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장은 교무실 중앙 탁자 위에 올라가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교감도 덩달아 드러누웠다. 교육자로서 역사에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학교장은 “내 나이 60인데 꼭 이렇게 해야 하겠어!”라고 외치며 인간적으로 아픈 데를 겨냥해 호소하였다. 나중엔 “ 0 0 0 선생, 나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럴 수 있소?”라거나 심지어 “너희들은 애비 애미도 없냐?”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구로고 전교조 교사들은 학교장과 교감, 그리고 일부 주임교사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20분 만에 공립고 최초로 분회 결성대회를 치러냈다. 창립대회에 참석한 전교조 동료 교사들은 가슴에 벅차오름과 동시에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누르며 창립대회 결성 선언문을 한 자 한 자 엄숙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도덕성을 결여한 탄압과 백골단의 몽둥이가 아니라 우리들을 바라보며 따르는 순진한 학생들의 그 착한 마음이며 초롱초롱한 눈망울이다.”

창립대회 결성 선언문을 다 읽은 전교조 교사들은 김00 선생님을 분회장으로 추대한 뒤 만세 삼창을 외쳤다. “민족교육 만세! 민주교육 만세! 인간화교육 만세!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만세!! '전교조 구로고 분회' 만만세!!!” -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대회 결성선언문」 가운데에서

학교운동장에선 귀가도 하지 않은 채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을 지지하며 2, 3학년 학생들 300여 명이 분회 결성 지지 침묵시위로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바로 탄압이 들어왔고 그것도 구로고등학교 한 곳에 집중되었다. 매일 구로고등학교가 KBS를 비롯해 전교조 관련 뉴스로 떠올랐다. 그런 속에서 탄압과 회유, 그리고 야비한 방식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한 교사들을 괴롭혔다.

집중 포화를 맞게 되면서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매일 전쟁터였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수많은 취재기자들이 학교를 들락거렸다. 비록 학교의 방해를 뚫고 1989년 6월 3일 '구로고등학교 전교조 분회'가 건설되었지만 노조에서 이탈 경향을 보이는 교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위기상황이 휘몰아치면서 김00 선생님이 분회장 직을 고사했다. 닥친 고난 앞에서 수학과 김승만 선생님이 흔쾌히 초대 분회장 직을 수락하시면서 구로고 분회는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바로 세웠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조직을 재정비했다. 초대 분회장에 김승만 선생님, 총무에 하성환 선생님, 대변인 및 서기에 김주영 선생님이 맡았다. 그로부터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은 1달 넘게 항의농성과 단식농성을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항의농성장, 갈릴리 교회, 학교 숙직실, 구로경찰서 유치장, 다시 학교를 오가며 6월과 7월을 숨 가쁘게 보냈다.

무엇보다 눈앞에 닥친 탄압과 회유 등 조직 분열 공작에 시급히 맞서야 했다. 노동조합 결성 직후,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교육과 노동』 회보를 통해 이탈하려는 조합원들 내부 결속을 다지며 응집력을 높이고자 했다.

▲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 발간한 회보 <교육과 노동 2호>(출처 : 하성환)

분회 회보 <교육과 노동>은 6/5일 1호를 시작으로 12/9일 11호까지 발간되었다.

나아가 회보를 통해 전교조의 도덕성을 드높이고 군부독재정권과 학교당국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인 여론전으로 맞섰다. 당시 전교조 사수 투쟁과정에서 도덕적 우위는 탄압에 광분한 군부독재정권이나 사회지배세력보다 전교조 교사들에게 있었다.

전교조 구로고 회보 『교육과 노동』은 1989년 6/5(월) 1호를 시작하여 1989년 12월 9일 11호 회보에 이르기까지 견결하게 여론전을 감당하며 싸워나갔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 조합원 교사들의 전교조 사수투쟁은 구로고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교로부터 열화와 같은 지지와 국민들의 성원을 받았다.

1989년 5월 14일 전교조 발기인 대회 당시 전교조 조합원 가입 숫자가 16,000명에 이르렀고 투쟁기금으로 2억 원의 성금이 답지했다. 그리고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당일인 6월 3일엔 전교조 조합원 교사가 30,000명을 넘어섰고 투쟁기금이 3억 원을 돌파했다. 노동조합 건설에 대한 교사들의 열망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구로고 분회 역시 6월 3일 창립대회 당시 조합원 36명에다 동료교사들이 투쟁기금으로 100만원을 넘게 모아주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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