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스승, 한국의 페스탈로치 성래운

- ‘사람됨’의 교육을 강조한 실천적 교육운동가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5.11l수정2020.05.1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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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2월 21일 연세대에서 열린 <고 성래운 선생 30주기 추모제> 행사 포스터

교육계에선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교사를 페스탈로치에 비유한다. 스위스 시민혁명의 내전에서 빈궁한 아이들을 돌봤던 페스탈로치를 ‘고아들의 아버지’, ‘사랑의 교육자’로 평가해 온 탓이다.

그러나 페스탈로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페스탈로치 연구의 대가 김정환(고려대 명예교수)은 이러한 표현은 페스탈로치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일갈했다.

심지어 페스탈로치를 평가할 때 “사랑만 있었지 가르칠 능력은 모자라 수업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정에서 깨진 유리조각이나 주웠다”고 폄훼하는 표현은 무지의 소치라고 단언했다.

무한한 희생과 헌신! 그것은 과거 독재정권이 교사를 관료의 말단으로 하대하며 반공 이념교육의 충직한 하수인으로 부리던 시절의 교사상이었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근면성! 그리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성실성(?)이 당시 독재 권력이 요구한 교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한국 교육계는 페스탈로치만 왜곡시켜 왔던 건 아니다. 다른 유명한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켜 왔다.

마치 아인슈타인을 순수과학자로만,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를 되뇌며 독배를 마신 것처럼! 또 헬렌 켈러를 삼중, 사중의 장애를 이겨낸 불꽃같은 화신으로만 가르쳐 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옹호한 과학자로서 죽기 직전까지 정치적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인생의 말년까지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아 미연방수사국(FBI)의 미행과 감시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역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플라톤의 저서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후대의 철학자들이 지어낸 농간이었음이 이미 밝혀졌다.

헬렌 켈러 역시 장애를 이겨낸 화신을 넘어서서 러시아 10월 혁명에 환호했던 사회주의자였다. 미국 사회당 당원으로서 정치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던 인물이다. 분단이라는 현실은 진실을 끊임없이 왜곡시켜 왔고, 나아가 한국 교육을 기형적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 낡은 교육질서를 전복시켜 교육을 통한 인간 해방과 인류 구원을 꿈꾼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 페스탈로치(출처 : 위키백과)

그렇다면 페스탈로치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김정환 교수는 25년 전 펴낸 『인간화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당대 낡은 질서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키며 교육계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가져온 인물로 표현했다.

어린이는 ‘망원경을 거꾸로 놓고 본 어른’이 아니다. 독립적 인격이자 자율적 주체로서 어린이를 인식한 최초의 혁명적 인물이 페스탈로치이다. 물론 거기에는 루소의 『에밀』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 마디로 김정환 교수는 페스탈로치를 ‘전투적 교사상’으로 표현하는 게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페스탈로치는 가난과 낡은 질서 속에 고통 받던 당대 민중에게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민중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하려는 ‘전투적 교사상’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모습이 페스탈로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자 페스탈로치에 대해 진실에 접근한 평가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페스탈로치는 스위스 시민혁명 와중에 국가사회의 낡은 교육질서에 저항하며 이를 혁명적으로 전복시켰던 인물이다.

교사인 어른이 지도해야 할 훈육의 대상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페스탈로치는 오히려 아이들의 자발성(자율성)을 존중하고 머리와 가슴과 손의 조화로운 발달을 추구했다.

특히 노작교육을 통해 노동을 세계인식의 기초로 삼았던 교육자이다. 참된 교육은 직관에서 시작되고 도덕적 지식의 체계보다 직관을 통한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도덕적 지식은 “학교를 파하고 도랑을 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며 오히려 “이웃 아이와 따뜻한 빵 한 조각을 나누어 먹었을 때 느낀 훈훈한 감정이 평생 잊히지 않는” 도덕적 감수성을 체득시킨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성래운은 한국의 페스탈로치이다. 식민지 시절과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낡은 교육질서를 전복시킨 실천적 교육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특히 박정희 유신독재와 국가주의 교육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도전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1978)이 그러하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국민을 일제강점기 시절 ‘황국신민’ 정도로 생각해 전 국민을 훈육의 대상이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어야 할 정신적으로 병들고 못난 사람들 취급을 하였다.

▲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장면(출처 : 정부기록사진집)

그리하여 전 국민을 상대로 ‘국민교육헌장’을 강제하였고 어린 초등학생으로 하여금 393자에 달하는 헌장 전문을 암송하게 하였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주입하고 강요했다.

한 마디로 국가=독재자에 충성하도록 전 국민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려는 불순한 욕망이었다. 철저한 반공 이념을 국민들 머릿속에 주입하고 고취시킴으로써 파시즘의 노예를 양산하는 기능에 충실했다.

이를 박살낸 것이 성래운, 송기숙이 주도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모두 송기숙 교수를 비롯해 전남대 교수들과 성래운 교수의 희생과 헌신이 만들어 낸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68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초등학생을 비롯해 전 국민에게 강요한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가주의 교육지표를 선언한 내용이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시절 줄줄 외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당시 담임교사는 방과후 한 명씩 불러내 외우지 못하면 변소 청소를 시켰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야단 맞아가면서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은 일제강점기 황국신민을 양성했던 교육칙어를 빼닮은 것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거스른 반(反)교육적 선언이었다.

당시 헌장 초안을 작성한 철학계 거두인 박종홍(서울대 철학과), 하버드대 교육학 박사 류형진(건국대), 도쿄대 교육학과를 나온 이인기(서울대 대학원장) 등 20명 교수를 동원해 정권이 기획한 작품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은 초중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 관공서에 박정희 사진과 같이 내걸렸다. 교육의 본질인 자율성과 민주성, 그리고 다양성을 외면하고 억압한 채, 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파시즘적 노예도덕을 강요했다.

당시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였는데 교과서마다 ‘국민교육헌장’이 교과서 첫 면에 실렸다. 전 국민을 상대로 세뇌교육을 통해 국가주의 가치를 내면화함으로써 박정희 1인 독재체제를 지향하려던 정권의 불순한 음모였다.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1972년부턴 아침 조회 시간에 학생들로 하여금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하게 했다. 그리고 1977년부터 시작된 국기강하식 땐 전 국민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 있어야 했다.

80년대까지 계속된 이 행사는 심지어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일반 시민들마저 국기강하식 행사 음악이 흘러나오면 보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벌떡 벌떡 일어서야 했다.

영화 『국제시장』(2014)에서 부부싸움을 하던 주인공 부부가 국기강하식 행사 음악이 나오자 다투다 말고 가슴에 손을 얹는 장면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일상생활 구석구석 모세혈관을 타고 스며들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도 남는 명장면이었다. 애국심이면 맹목적인 것이라도 ‘절대선’으로 포장돼 한껏 위세를 부리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민교육헌장’이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고도 한참을 지난 1994년부터였다. 매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일을 국가기념식 행사로 진행해 왔던 것을 1994년부터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참여 정부 시절 공식적으로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식 행사를 국가기념일에서 삭제했다. 잘못된 제도는 쉽게 만들어지지만 잘못된 제도를 없애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서슬 퍼런 유신체제 폭압 속에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한국현대교육사에 크나큰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국가주의 낡은 교육질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도전함으로써 한국교육사에 큰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육의 암흑기가 지속되는 속에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한국교육에 한 줄기 빛을 비춰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성래운 교수와 송기숙 교수가 주도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오늘날 한국 교육이 실패한 이유를 민주주의 교육이 뿌리내리지 못한 데서 찾았다.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가 바로 국민교육헌장임을 지목했다.

박정희가 강요한 국민교육헌장이 일제치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고 성토했다. 그리하여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낡은 국가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권력에 순응하는 인간을 양성할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용기를 강조하는 교육을 천명할 것을 선언했다.

성래운 교수가 70년대 중반 이후 당대 지식인으로서 국가권력에 맞서 저항했던 데에는 보통학교 시절과 경성사범학교(해방 후 경성여자사범학교와 함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명칭이 바뀜) 예과 시절 일본인 교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성래운 교수 스스로 자신의 스승은 일본인 교사였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1940년 어느 여름날 일본인 담임교사는 성래운을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선생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네에게 충고한다. 지금 자네는 제 나라를 힘으로 강점하고 총칼로 수탈하며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는 침략자의 나라를 찬양, 존경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진정 자네가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면 지금 학교를 자퇴하라. 그리고 자네의 민족을 위해 옳은 길을 찾아 그 길을 떠나라.”

오늘날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던 시절 담임교사 오까모도 선생은 어린 제자 성래운에게 충격적인 속마음을 털어 놓은 것이다. 제국주의 교육자로서 살아가기보다 사람을 길러내는 참교육자의 모습을 성래운은 자신의 담임교사 오까모도를 통해 경험했다. 훗날 성래운은 스스로 고백했다 자신의 참 스승은 일본인 오까모도였음을!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성래운에게 평생 교육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나침반이 되었다. 물론 오까모도 선생은 이후 경성(오늘날 서울) 시내 다른 지역 학교로 강제 전출된 후 본국으로 송환돼 감옥에 갇혔다.

제국주의 식민교육자로서 살아가기보다 사람을 길러내고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지향했던 오까모도 선생은 일본 내 ‘비국민’으로 낙인 찍혔다. 마치 제국주의 시절 반전평화를 부르짖은 일본인들처럼 오까모도 선생은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교육을 거부하고 감옥행을 택한 것이다. 교육자로서 성래운 교수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교사가 바로 경성사범학교 시절, 오까모도 선생이었다.

다음으로 참교육자 성래운 교수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친 스승은 보통학교 시절 담임선생이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시학관(오늘날 장학관)이 학교현장에 내려왔을 때 시학관 앞에서 옴짝달싹도 못한 채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시학관에게 보고하듯이 “새 일본을 만드는 일꾼이 되라!” 고 몇 차례 힘주어 강조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조선의 아이들은 담임교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강요된 것임을 직감했다. 오히려 성래운을 비롯해 조선의 아이들은 담임교사가 외치는 목소리를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는 일꾼이 되자”로 새겨들었을 정도였고 모두 그렇게 다짐했다.

바로 그 보통학교 담임선생님이 1979년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성래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제국주의 시절 교육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참회했다. 어느 날 서울에서 보통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 성래운 교수에게 지난날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내가 자네 어렸을 적에 가르친 것은 조선총독부의 명령을 받아 일본 제국의 신체제를 지지하는 일본인이 되라는 것이었는데... 정년퇴직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학교 선생들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그들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데서 오는 건가 보이”

참교육자 성래운을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인 스승이었다. 보통학교 시절 권력이 시키는 대로 아이들 앞에서 국가주의 교육을 외치던 담임교사의 얼어붙은 모습이 그러했다. 아이들 눈에 비친 담임선생님은 시학관 앞에서 고양이 앞에 선 쥐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그 담임선생님은 성래운 교수에게 참교육자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면서 교육자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모습에서 교육자 성래운은 깊이 자책하고 자신을 성찰했다.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30년 독재체제 아래 자신은 단 한 번도 ‘분단시대 교육’을 성찰한 적도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거쳐 간 제자들에게 흐느끼면서 분단시대 교육자로서 순응적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한 적도 없었다. 교육의 이름으로 체제순응교육, 분단교육을 행했던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적도 없었다.

자신을 가르친 일본인 스승을 보면서 성래운은 교육자로서 심히 부끄러웠고 참담했다. 성래운이 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고 민주주의 회복교육을 부르짖은 데엔 일본인 스승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경성사범학교 예과 시절 담임교사였던 오까모도처럼 ‘비국민’으로 낙인 찍혀 감옥에 갇힐 것을 각오하지는 못할망정 보통학교 시절 담임교사처럼 성찰도 없었고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흐느낌도 없었다.

70년대 성래운 교수(연세대)가 교육계 반독재 민주화 투쟁 인사로 급선회하는 결정적 계기는 모두 보통학교와 사범학교 시절 두 일본인 스승의 정신적 영향이 너무도 컸다.

그리하여 뒤늦게 성래운은 교육자로서 분단교육,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음을 깊이 참회하고 성찰했다. 독재체제 국가주의 교육 아래 교육은 교사가 하는 게 아니라 독재체제가 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성래운 교수는 교육을 ‘인간다움’을 길러내는 것! 바로 ‘사람됨’의 교육, ‘인간성 회복’ 운동으로 보았다. 1953년 한국교육문화협회에서 발간한 『敎育文化』 2월호에 성래운은 「서울특별시 초등학교 학급의 집단과정」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 글에서 성래운은 “사람은 오직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만 사람답게,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는 것도, 학문이 밝혀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경쟁을 통한 교육은 너도 잡아먹히게 하고 나도 잡아먹히게 하고 그리하여 너도나도 함께 잡아먹히게 하는 교육”이라고 진단했다.

그리하여 “남을 잡아먹는 기술이 이 나라에 가득 차 있었기에 마침내는 그놈마저 아니, 온 나라가 송두리째 일본에 삼킴을 당했고 지금껏 이 백성이 헐벗음과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까닭도 경쟁을 통한 교육이 자랑 삼는 ‘우등생’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경쟁 속에서 잡아먹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성래운 교수가 당시 한국교육을 비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50년대 곤궁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식민지교육에 대한 역사청산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육은 교육이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교육계는 미국에서 유행했던 존 듀이(J. Dewey)의 경험중심교육과정을 흉내 내기에 분주했다.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제도임에도 현실은 공립초등학교조차 월사금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는 실정이었다. 사립학교로 가면 사립재단에서 전입금을 늘려 교육재정을 충당하기보다 부정입학과 금품이 오가는 등 학내비리가 요지경 세상이었다.

이를 두고 성래운은 “한국에는 공립학교도 없고 사립학교도 없다”며 오직 있는 것은 ‘사친회립(師親會立) 학교’라고 일갈했다. 게다가 명목상 ‘새교육’을 표방했음에도 듀이의 경험중심교육과정이나 생활중심교육과정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낯선 요리’라며 선언적 성격으로 그쳤음을 비판했다.

성래운 교수는 민족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스러져간 민족민주열사를 ‘민족의 스승’으로 삼았고 그들을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1980년대 초 성래운 교수가 한국교육을 진단한 내용은 참담했다.

“학교가 노예생활 못지않은 진학지옥을 방불케 한다. 우리의 교육열이란 일류학교에 진학해서 잘 사는 소수계층에 끼이려는 몸부림인 것이다...(중략)... 더욱더 문제인 것은 교육 받는 동안에 되어가는 사람의 모양이다. 겉모양이야 학교 안 다닌 사람보다 말쑥하지만 그 속에 채워지고 있는 것은 짐승세계이다. 학교교육은 사람됨으로 채워지지 않고 제 욕심 채우기 위해 친구까지 서슴없이 쓰러뜨리는 짐승 꼴을 취하고 있다.”

성래운 교수가 내린 한국교육의 자화상은 실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사람됨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어린 학생들을 약육강식의 짐승세계로 내모는 황폐화된 교육으로 진단했다. ‘참교육’을 꿈꾸며 당시 학교교육을 ‘거짓 교육’, ‘죽음의 교육’, ‘병든 교육’, ‘살인 교육’, ‘식인 교육’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이오덕 선생과 같은 진단이었다.

성래운 선생 역시 한국의 학교교육보다 더 나쁜 교육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착한 심성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끝없이 경쟁으로 내몰며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주입교육이자 경쟁세계의 훈련으로 보았다. 그 끝은 인간으로서 자기 존엄성을 갉아먹어 황폐화된 인간성, 바로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성래운 교수는 교육의 본질을 ‘사람됨’, ‘사람다움’에서 찾았다. 교육의 목표를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교육은 사람 되게 하는 활동이자 사람다움을 길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성래운은 이렇게 고백하며 탄식했다. 오늘날 교육은 사람 되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돈 놓고 점수 따기> 교육으로 살벌한 도박판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더 이상 학교에선 사람 되게 하는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탄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학교교육을 그토록 타락시킨 주범은 누구일까? 학교교육이 사람 되게 하는 교육을 할 수 없도록 만든 원흉으로 성래운은 두 가지를 지목했다.

첫째는 교육을 독재정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에서 찾았다. 사람을 독재정치의 제물로 쓰려고 거짓을 가르치고 머릿속에 주입해 왔다. 가르쳐야 할 참된 지식을 애초부터 가르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국민을 종삼아 부려먹기 쉽게 ‘읽기, 셈하기, 생산기술’은 가르치되 ‘인간 존엄’이나 ‘인권’, ‘국민주권의식’은 처음부터 싹도 트지 못하게” 학교교육을 국가가 통제해 왔다고 비판했다.

둘째로 부모를 비롯해 가문이나 사회 연장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들을 채근하며 입신출세의 도구로 교육을 퇴락시켜 왔다는 점을 주목했다.

성래운은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에서 교육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루소의 『에밀』을 한국 사회에 견주어 편지 형식으로 새롭게 풀어쓴 『인간 회복의 교육』(1982)은 그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학교교육은 입시경쟁교육으로 치닫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질 못한다고 탄식했다.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신나게 놀고 기쁘게 노래하며 아름답게 웃을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잘 놀고 기쁘게 놀며 사랑스레 놀면서 자란 아이들이 건강한 어른으로, 그리고 의젓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지금 세계의 어린이들이 어른들과 달리 전쟁을 모르고 평화 속에서 창조를 즐기며 살아가게 하는 길은 아이들로 하여금 평화를 살게 하는 것뿐”이라는 성내운 선생님의 말씀은 그래서 호소력이 컸다. 아이들이 평화를 살아야 어른이 되어서 평화를 만들 수 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63년 성래운은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여기에는 1960년까지 연세대 교수와 부총장을 지냈던 외솔 최현배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한 성래운은 이듬해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연세대학교 부속 지체장애 아이들이 생활하는 기숙형 초등학교 교장이 되어 장애어린이 교육을 담당했다.

그 당시 목격하고 실천했던 교육경험을 글로 엮은 것이 1983년에 출간된 『세 학교 이야기』이다. 『세 학교 이야기』는 한국 사회와 교육에서 소외된 장애어린이, 농촌 아이들의 농촌야학, 그리고 도시 근로청소년들이 삶과 앎을 배워가는 노동야학을 다룬 책이다.

성래운 교수는 그 책에서 몸의 부자유를 겪고 있는 장애 아이들이 헬렌 켈러 공부를 통해서 어떻게 ‘사람다움’을 체득해 가는지 세밀하게 그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이 한 달 넘게 불화를 겪다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참을성’을 학습하고 체득한다.

그리고 어린이회의를 통해 아이들은 ‘일곱 살 난 헬렌 켈러’라는 각본을 직접 쓴다. 급기야 아이들은 진흙을 짓이겨서 협력하여 ‘헬렌 켈러 흉상’을 손수 만든다. 마지막엔 헬렌 켈러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은 편지 쓰기를 실천하는데 그 교육의 전 과정에서 장애 아이들이 겪는 내면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모두 성내운 교수가 추구했던 ‘사람됨’을 기르는 교육이자 ‘인간화 교육’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협력과 자율성에 기초한 교육의 과정이 아이들로 하여금 내면의 도덕성 발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매우 소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마치 페스탈로치가 교육방식으로 직관의 원리를 강조한 것을 학교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래운의 ‘일곱 살 헬렌 켈러’ 수업은 자율성과 협력수업이 빚어낸 훌륭한 도덕성 발달 수업의 귀중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성래운 교수는 서양 전래의 도구주의적 자연관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인류의 존속과 평화를 위해 ‘교육을 통한 인간혁명’을 부르짖었다. 서양의 기술주의적 자연관은 동물과 식물을 비롯해 자연은 인간의 편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그간의 학교교육 역시 서양의 그릇된 자연관에 함몰돼 왔음을 고백하며 이를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교육을 역설했다. 특히 “착취당하는 칠레의 한 노동자가 미국의 어떤 기업체의 이윤보다 더 존중받는 그러한 세계를” 만들길 원했던 미국 백인 교육자인 로버트 맥가피 브라운의 말을 인용하며 ‘교육을 통한 인간 혁명’을 강조했다.

“예수는 우리를 모든 그릇된 충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아닌 사람들의 세계를 보게 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해방하여 타인들, 즉 가난한 자, 없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과 더불어 투쟁하도록 만든다...(중략)... 나는 내 나라 미국이 더 이상 세계 제일이 될 수 없는 그러한 세계...(중략)... 외교적인 압력의 수단으로 네이팜탄이 사용되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나를 자유케 한다.”

그리하여 성래운은 미국의 로버트 맥가피 브라운 같은 교육자를 한국에서도 교육을 통해 길러 낼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를 위해 주한 미국 교육사절단장을 역임한 해럴드 벤자민 교수가 쓴 논문 「전쟁과 평화를 위한 민중교육의 본질에 관한 고찰」을 언급한다.

인류의 평화와 존속을 위해 억압받는 세계의 민중들이 더 이상 지배자의 교육에 이용당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도록 자신의 민중교육에 대해 스스로 지휘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하면서 다수 억압받는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을 절망에 빠트리고 인간성을 퇴락시키는 교육을 지속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성래운은 ‘인간화 교육’ 못지않게 ‘민족교육’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의 근현대시 시낭송 자체가 식민지 민족의 고난과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을 노래하는 시낭송으로 가득한 이유이다.

▲ 외솔 최현배 선생은 평생 <한글만 쓰기를 피를 토하듯 역설한 한글전용론자>이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서 언어-민족 일체관에 기초한 언어정책을 강조했다.(출처 : 대종교 홈페이지)

4·19 교원노조를 인정할 것을 역설했던 성내운 선생은 1960년 문교부 관료생활을 할 때 한글학자이자 한글운동가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방문을 받았다. 최현배 선생은 늦은 밤, 밤 한 말을 사들고 성래운 선생 집을 방문했다. 밤 한 말을 집 안에 내려놓고 외솔은 한글사랑을 강조하며 성래운으로 하여금 한글전용정책을 펼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래운 선생은 영어에 능숙하였지만 외국말 쓰는 것을 싫어했고 한글로 쓰기를 고집했다. 한글로 이름자를 써서 신문이나 잡지사에 기고하면 한자로 고쳐서 활자화돼 당시 안타까웠다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성래운 선생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1985년에 펴낸 성내운의 역저 『분단시대의 민족교육』 역시 그러한 정신과 의식의 결실이었다. 성래운은 이 책 대담에서 분단시대 교육은 분단순응교육으로 공포와 증오의 교육임을 술회한다. 그리고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은 통일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교육으로 그것이야말로 진정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이자 겨레의 양심에 따른 민족교육이라고 일갈한다.

▲ 성래운과 함께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창립해 공동대표를 역임한 이오덕. 성래운과 이오덕은 민족교육, 민주교육, 인간화교육을 몸소 실천한 참교육 운동의 선구자이자 전교조를 탄생시킨 정신적 기둥이 된 교육자들이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자 이오덕 선생은 이제껏 분단순응교육이 분단을 더욱더 조장해 온 교육이었다고 진단하며 앞으론 통일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통일을 위한 교육은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인간적인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방 직후 성래운은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췄고 1948년 대학 재학 시절 미국 학자가 교육철학과 교수법을 강연할 때 이를 직접 통역했다. 놀랍게도 당시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중엔 통역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원식 등 서울대 교육학과 출신 상당수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당시 성래운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송기숙(전남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성래운이 비록 1954년 미국교육시찰을 갔다 왔을지언정 미국 유학을 꿈꾸진 않았다. 미군정 3년 동안 식민지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 교육을 부르짖는 모순 속에서 미국의 실체를 인식한 때문이었다.

오히려 성래운은 1960년 4월 혁명 직후 들어선 과도정부 당시 교육 관료로서 역사적인 ‘4·19 교원노조’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 교육정책 전문위원으로서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사립학교법 개악에 반대해 전문위원직을 사퇴했다.

1965년 펴낸 『한국교육의 증언』을 통해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했고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턴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낡은 질서를 해체시키고자 고군분투했다.

▲ 1989년 12월 25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영결식장에서 열린 성래운 선생 추모의 밤 행사 장면

(출처 : 박용수 작가)

성래운은 63세로 작고하기까지 39세에 펴낸 『한국교육의 증언』을 비롯해 10권이 넘는 교육 관련 저서와 1974년 『민중교육의 본질』 등 번역서 6권을 펴냈다. 문교부 수석장학관, 문교부 정책실장, 교육정책 전문위원, 성균관대, 연세대 교수, 학생처장, 문과대학장 등 제도교육권에서 문교부장관을 제외하고 두루 요직을 거쳤다. 그럼에도 성래운은 제도권에 안주해 편안한 길을 선택하기보다 70-80년대 고난에 찬 재야 교육운동가, 민주화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성래운 교수는 300편이 넘는 시를 암송하는 음유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성래운 교수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시를 낭송한 것도 1970년대 중반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고 1970년대 후반 무렵부터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문인들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 전전신) 모임에 초대되었을 때 성래운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시를 낭송했다.

그 첫 번째 낭송한 시가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이었다. 70년대 암울한 민족현실을 적나라하게 형상화한 작품이었는데 성래운 교수는 그 시가 가슴을 파고들었다고 고백했다. 국어교사였던 양성우 시인이 ‘참교육’을 지향하며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시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물론 그 시가 일본에서 발표되자 박정희 정권은 국가모독죄로 양성우 시인을 투옥시켜버렸다.

성래운 교수는 근현대시를 낭송함으로써 암울한 민족현실과 우리역사의 비틀린 현실을 고발했다. 성내운의 그러한 실천은 기존 낡은 권위에 저항하면서 낡은 질서를 해체시키려는 전복적 행동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인 작태를 고발한 것이다.

나아가 교육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반교육의 실태를 고발한 것이기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교육자의 참모습을 실천적으로 체득한 성래운은 1950년대 초부터 사람됨의 교육! 바로 인간 회복의 교육을 부르짖었다. 60년대 소외계층의 장애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교육의 본질에 깊이 천착해 들어갔다.

▲ 성래운 교수가 1968년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

뒤에 보이는 건물이 핀슬홀인데 일제강점기 당시 기숙사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3총사가 묵었던 공간이다.(출처 : 하성환)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연세대 교정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희구하며 윤동주의 ‘서시’ 시비를 세운 것도 1968년도 일이다.

그리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직후 성내운은 직접행동에 돌입한다.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희생된 동료교수와 제자들을 위해 교수기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무엇보다 연세대 학생처장으로 재직 당시 교내시위 등 학생운동을 하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제자들을 퇴학시키면 안 된다고 온 몸으로 막았다. 그 결과는 1976년 교수재임용심사에서 탈락되는 불운으로 이어졌다.

강제해직된 이후 성래운은 몸소 유신헌법 철폐와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식민지 노예교육으로 그리고 다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의 신민(臣民)교육으로 일그러지고 피폐해진 한국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분투했다. 국가권력이 교육을 손아귀에 쥐고 아이들을 폭군처럼 지배하며 이념적 획일을 강제하는 교육현실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성내운이 일으킨 직접행동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국가주의 교육을 아이들에게 강제한 박정희 식 ‘반(反)민주 반(反)민족 반(反)인간화 교육’에 맞서 성래운과 송기숙이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자 교육계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 전남대 인문대 교정에 건립된 <교육지표> 기념비(출처 : 지역문화교류 호남재단)

당시 법정 최후 진술에서 성래운은 포승줄에 묶인 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정성껏 낭송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짓지 않았노라’며 판사 앞에서 당당히 진술을 마쳤다.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하게 여겼던 페스탈로치처럼 성래운은 교육혁명을 꿈꾸었다. 페스탈로치가 교과서 없이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전 인격적인 노작교육을 실천함으로써 조화로운 인간성을 추구했듯이 성래운 역시 60년대 중반 장애 어린이 교육을 담당하면서 아이들의 자율성과 인간성 회복의 교육을 몸소 실천했다.

페스탈로치처럼 교육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나아가 인간성 회복의 교육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래운의 이러한 실천적 노력은 90년대와 2000년대 대안학교를 통해서 계승되었고 2010년대 진보교육감이 시도하고 있는 ‘혁신교육’과 ‘행복교육’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페스탈로치는 교사 윤리 못지않게 교사의 권리를 옹호했던 인물이다. 교육자로서 지녀야 할 윤리도 중요하지만 교육권이 침해되었을 때 교사의 권리 역시 소중하다고 본 인물이다. 따라서 페스탈로치는 교사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교사들은 힘을 모아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권을 향한 선한 싸움을 옹호했던 페스탈로치는 역사상 최초로 교직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다. 페스탈로치가 스위스 교원노조의 시초인 「스위스 교육자협회」를 1807년에 처음 설립함으로써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로 추앙받듯이 성래운도 교원노조! 전교조 설립의 기초인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설립해 초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꿈꾸었던 ‘민주교육, 민족교육, 인간화교육’을 ‘참교육’ 이념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민족교육, 민주교육, 인간화 교육>을 참교육 운동이념으로 표방한 전교조.(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한국사회의 낡은 봉건성과 전근대성을 종식시키고 일제식민지교육과 군사문화를 학교교육에서 영구히 추방시키고자 애썼다. 그렇게 함으로써 낡은 교육질서와 교육모순 속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을 해방시켜 행복한 사람, 바로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것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오늘날 우리 교사들이 성래운 선생을 ‘시대의 스승’이자 ‘교사의 사표’(師表)로 받드는 이유이다. 성래운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의 페스탈로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집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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