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의 객주(客舟)편에는 항해를 할 때 바다가 깊은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얕아서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 조수가 빠지면 배가 기울어져 배를 구할 수 없게 되므로 납추(鉛錘)를 떨어뜨려 바다의 깊이를 재어보았다고 하였다. (조동원 외(2005), 고려도경, 제34권 해도1 객주편, 황소자리).

이 배가 비록 송나라 배이긴 하지만 이 배는 첨저형의 배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류가 활발했던 동시대에 우리만 이러한 배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바다에서 인양된 배들을 보면 하나같이 고려시대의 배들이다. 이러한 배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배의 밑은 몇 판이고, 삼은 몇 판으로 되어있더라고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우리의 배들은 모두 다 똑같이 생겼다고 마치 수학공식 같은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배란 크기나 용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나무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조 때의 기록에 배를 건조할 때에 본판(本板)의 경우는 나무 하나를 덧붙여서 그 넓이를 약간 증가시키고, 삼판(杉板)의 경우는 소나무의 대소(大小)에 따라 7립(立)을 쓰기도 하고 혹은 8립을 쓰기도 한다고 했다. (국역왕조실록, 정조 22년 무오(1798, 가경3) 1월 21일(병술)).

이처럼 나무의 크기에 따라서 쪽수가 달라지는데 모두가 똑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배들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기록이 또 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보면 우리나라(조선)의 배 제도는 만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고 했다. 즉 좁으면서 긴 것이 있고, 넓으면서 짧은 것이 있으며, 크면서 얕은 것이 있고, 적으면서 깊은 것이 있다고 했다. (이익성(1997), 경세유표, 균역사목추의 선세편).

배란 지금도 용도에 따라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이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모든 배들이 틀에 박힌 치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대의 선박도 어선이냐 화물선이냐에 따라 장폭비나 부자리삼의 경사각이 다르고 높고 낮음을 달리한다.

또한 우리의 배를 두고 고려 때는 좌선(坐船)이라고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오면서 평저선이라고 했는데, 평저선이란 말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평저선이라고 해서 배의 밑이 앞에서부터 뒤까지가 수평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서 오늘과 같이 이상한 배가 되어 움직일 수도 없는 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바다를 알고 항해를 알았다면 이러한 일들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쩜 고려 때 좌선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옳았다고 본다.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학자님들께서는 한번 주장을 하면 그것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번복을 하지 않으니 이 나라 학문이 발전을 할 수가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지역(완도)에서 배를 만들었던 기록들을 살펴보면, 1460년에 조전선(漕戰船) 100척을 만드는데 여러 고을에서 선장(船匠) 100명, 목장(木匠) 200명을 뽑아서 변산과 완도에 보내라는 기록이 있다. (국역왕조실록, 세조 6년(1460) 7월 1일.)

▲ 서긍의 뱃길. 1123년 송나라 국신사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서긍이란는 사람이 한달 남짓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적어 놓은 책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란 책인데 이 책에 실려있는 항해의 길이다. 출처 조동원, 김대식, 이경록, 홍기표 공저인 고려도경, 황소자리 출판 2005년 2월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마광남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