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체험기

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위험에 처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저자도 무서운 경험을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니까 경험이라고 말을 하지만 당시의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저 파도를 피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59915(음력 8.13~15)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추석을 며칠 앞둔 음력 812일이다.

당시에 청산도 근해에서 참조기(石首魚)가 잡일 때였다. 조기를 잡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어린 나이에 어선을 따라 가려고 했으나 부모님께서 반대를 하셔서 갈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부모님들이 모르게 가려고 옷가지를 싸서 담 너머로 던져 놓고 이웃집 아저씨 배를 따라 갔는데, 그 엄청난 사라호 태풍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치 추석이 임박한 때라 2일을 조업하고 3일째 되던 날 마지막 조업을 끝으로 집에 오기로 했는데, 그날이 바로 음력 814일로 소위 작은 추석날이다.

음력 812일과 13일 이틀 동안 조업을 하였는데 상당히 많은 조기를 잡았다. 조기는 잡아서 물칸(어창)에 넣어두면 부-욱 부-욱하고 조기 특유에 소리를 내는데, 마치 방음시설이 안된 공간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고기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으면 어민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아주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로 그놈 소리가 꼭 이화중선(국악명창의 이름) 같구나하면서 소주 한 잔 마시고 껄껄대며 웃곤 하였다. 그 어른들에 그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 내일 하루만 조업을 더하면 집에 간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배에서 잠을 자는데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잠결에 몸이 물에 젖는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은 젖어있었고 비바람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세차게 불고 있었다.

지금이야 비가 오면 선실이 있으니 비를 맞지 않지만 옛날에야 어디 그랬는가. 그 비를 고스란히 맞고 날이 밝았다. 오늘이 집에 가는 날이다.

당시에는 광목으로 만든 돛을 텐트 대신 치고 자는데 밖에서 이슬비가 와도 안에는 굵은 비가 오는 것과 같으니 비를 피하는 방법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아침밥을 먹었다. 따뜻한 밥을 먹었어도 비를 맞아서인지 추웠다. 그래서 뱃사람에게 오뉴월이 없다고 했는가 싶다..

이때 누군가 소리소리 치며 내려오라고 하였다. 빗속으로 보니 우리 마을분인데, 당시 청산 우체국장으로 계셨는데 고향의 배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배를 버리고 빨리 육지로 내려오라고 그 비를 다 맞고 서서 외치고 있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고 이장옥 씨였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이 10시 쯤 되었을 때 선주인 고 지시정(池時正) 아저씨가 집엘 가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뒤돛은 2활을 묶고 출발을 했다.

청산도의 도락리에서 출발을 한 것이다. 청산도를 벗어날 때까지는 그렇게 파도가 심한 것도 아니고 해서 어린 마음에도 이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청산도를 막 벗어나니 파도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청산도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인데도 파도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것은 시커먼 구름 낀 하늘뿐이었다. 배가 파도위로 올라가면서 이물이 위로 올라 갈 때는 꼭 배가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정말로 아니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경험을 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을 것이다.이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청산도에서 완도 쪽으로 4분의 1지점쯤에 왔을 때 앞돛의 맨 밑쪽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고 말았다.

훗날 보니 이곳은 모래 톱(산처럼 높이 솟아있는 곳)이 있는 곳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수심이 얕은 곳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파도가 더 심했던 것이다. 돛이 찢어졌으니 배가 중심을 잃으려고 하였다. 배는 45도와 뒤바람 항해에 가까운 항해를 하고 있었다

선주인 아저씨는 평생을 배 생활을 하신 분이라서 그랬을까 순간적으로 뒤돛을 내리면서 배의 방향을 바람 아래로 돌리면서 빨리 돛을 내려서 한 활을 줄여 묶으라고 소리친다. 나이 어릴 때라 빠르게 앞으로 가서 돛을 내리고 한활을 줄여 묶고 다시 돛을 올렸다. 돛을 올리자 다시 배를 바로 세우고 어떻게 왔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배는 집 앞에 와 닿았다.

그날 저녁(음력 8.14) 바람은 최대로 불었는데 순간 최대 풍속이 시속 85m, 평균풍속이 45m였다고 한다 .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히고 815(음력) 추석날 바람은 멈추었다.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때는 어릴 적이라 잘 몰랐으나 훗날 생각해보니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 바다가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가 논이고 밭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속된 말로 배운 것이 도둑질 밖에 없다고 하는 말과도 같다.

그림과 같은 배로 조업을 하였다. 길이가 야 10m 정도인 배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배다.
그림과 같은 배로 조업을 하였다. 길이가 야 10m 정도인 배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배다.

이후로 성장을 하면서 돛단배(風船)를 타고 고기잡이를 했지만 그때의 일이 항상 머릿속에 있어서 무척 조심을 하여 그 후로는 그렇게 무서운 고비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의 중반부터 동력선으로 바뀌었다. 기계의 힘이 좋은 것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바람이 불어도 별로 걱정할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어느 날이던가 겨울철에 소안도와 당사도 사이에서 조업을 마칠 무렵 북서풍이 예사롭지 않게 불었다. 평소 같으면 소안과 노화도 사이를 통해 완도로 향하였을 것인데 그날은 그렇지를 못했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파도를 정면으로 받고 항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 45도 방향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즉 모도라는 섬을 향하여 파도를 옆으로 받으며 항해를 한 것이다. 그런데 모도와 불무도(붉은도) 사이로 접어들 무렵 너무나도 큰 파도가 밀려와 생의 마감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저 파도를 피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물로 받는다면 배는 물속으로 들어갈 것은 빤한 일이고 고물로 받으려니 선실에 물이 가득 찰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선원들은 모두 다 선실에서 쉬고 있고, 혼자서 항해를 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선원들에 생명은 나의 순간적인 판단에 달려있었다.

배를 물속으로 집어넣는 것 보다는 고물로 파도를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 파도를 배의 고물로 받았다. 그 순간 물의 무게로 배의 고물이 물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파도가 선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말았다. 밖의 일을 모르고 있던 선원들은 온 몸이 물에 젖은 채 몸을 털면서 밖으로 나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요즘의 동력선은 배안에 물이 차면 자동으로 물을 퍼내는 장치가 되어있지만 당시의 소형 선박은 그러한 장치가 없고 수동으로 물을 퍼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배에 물이 차면 그것을 퍼내는 것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파도가 이어서 오질 않았기에 무사히 모도라는 섬의 조용한 곳에 닻을 내리고 정박을 하고 다시 항해를 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쉬어야 했다. 당초에 출발을 하지 않고 소안도에서 그대로 있었더라면 이렇게 무서운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놈에 기계의 힘만 믿고 조심을 하지 않는 탓이었다..

또 한 번은 1978년으로 기억된다. 4ton 정도 되는 동력어선이었다. 그러나 이 배는 자동차용 엔진을 올려서 속도가 완도에서는 제일 빠른 배라고까지 한 배였다.

늦은 가을이었다. 그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당시에 거문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었다. 거문도에 갈 때는 오후에 출발을 하여 거문도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조업을 한다..

거문도에 갈 때는 야간항해가 되는데, 거문도 가까이 가면 돌고래 떼가 마치 배를 호위하듯이 좌우에서 배에 가까이 왔다가는 멀리 떨어지기를 반복을 하면서 배와 같은 방향으로 한참을 따라오는데 처음에는 돌고래인줄 몰라서 무서웠으나 나중에는 어쩌다 보이지 않으면 서운해지기도 하였다.

아침에 날씨가 무척 좋아서 새벽에 조업을 1차로 하고 2차 조업을 하려고 어장지에 나가서 막 시작을 하려는데 서쪽이 캄캄해 오기 시작했다. 계절로 보아 어민들이 이 시기에 서쪽이 캄캄해지면 제일 무서워하는 날씨의 조짐이다. 이렇게 돌변하는 날씨를 어민들은 구시월 도지 또는 도지기라고 한다.

그래서 하려던 조업을 급히 멈추고 항으로 들어오려고 뱃머리를 돌렸을 때 바람은 이미 배를 덮치기 시작하고 말았다. 이때도 선원들은 선실로 들어가고 혼자서 항해를 시작했다. 날씨가 좋을 때 같으면 10여분 남짓이면 오가는 거리다. 그런데 1시간이 다 되어서야 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람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300m 후방에서 저인망 어선이 자기도 바람을 피해오면서 작은 배가 심한 파도 속에서 항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치 호위라도 하듯이 맴돌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가 생각나 눈시울이 적셔온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배가 항 가까이 가는 것을 보고 자기의 갈 길을 갔던 그 배, 그때 그 선장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때의 고마움을 이제나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배의 선명이라도 보아 놓았으면 훗날이라도 고마운 인사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당시로서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핑계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배 생활을 1980년대의 초반에 그만두고 육지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배 만드는 기능이 사라질 것 같아서 혼자서 걱정을 하면서 모형 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에 2001년 노동부로부터 한선기능 전승자로 선정이 되었고, 2013년 전남도 무형문화재 조선장이 되었고, 2018년에는 한국 신지식인에 선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1998~1999년 완도의 장보고축제 때 모형 배를 전시했었는데, 참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였다. 지역사람들도 그러했지만 배를 잘 모르는 육지 쪽 사람들이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전시회가 되었다.

전시회를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내 젊을 때 저 배를 타고 고기를 많이 잡아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생활을 해왔다고 하면서 빙그레 웃는 그러한 모습을 보았다. 또 다른 반응은 저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할 때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고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 가지의 사안을 놓고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보면서 전시하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보람도 있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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