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해 선소

 

▲ 남해 선소(제공: 남해문화원)

위 사진은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92-9번지에 있는 비로 비에 명칭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1972년 2월 12일 지정되었다. 문화재 명은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는 선조 31년(1598)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일본 패잔병 500여명은 관음포를 통하여 육지로 올라와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선소의 왜성으로 갔으나 왜성의 주둔군이 도망하고 없자 패잔병들은 주민들의 선박을 탈취하여 일본으로 도주한 후였다.

명나라군은 이곳에 도착하여 왜군을 찾았으나 이미 떠나고 없으므로 다음해인 선조 32년(1599)에 왜성 아래에 있는 자연바위(自然岩)에다 유격대장(遊擊大將) 장량상이 각자(刻字)한 것이다.

그 내용은 명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남해까지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으로 명나라의 위대함을 암각(岩刻)한 전승시비(戰勝詩碑)로 12행(行) 종서(縱書)로 된 마애비다.

주록(周綠)에는 당초문(唐草文)으로 띠를 돌려 새겼다.

비문 말미에 “만력(萬曆) 二十六年 계추(季秋) 국가복유(國家復有) 간동제(干東弟) 유시(維時) 조선수왜환지시(朝鮮受倭患至是) 육칠년의(六七年矣) 아사구지(我師救之) 황명(皇命) 만력(萬曆) 二十七年 양월상완길조일건(陽月上浣吉兆日乾)”으로 새겨져 있다(남해문화원 제공).

남해 선소는 배를 만들거나 수리를 하였던 곳이라고 보기엔 너무 협소하고 뒤편이 급박한 언덕으로 만조 시에는 공간이 없어 이곳에서 배를 만들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그냥 배를 매어 두었던 곳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2) 대굴포 선소

함평문화원에 의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선소가 있었다고 한다. 2006년 함평문화원의 향토문화 논단에 의하면 세종 14년(1432) 10월 20일 전라도 순찰사 정흠지(鄭欽之)가 본도의 대굴포(함평군)에 있던 수영을 목포에 옮겨 설치하고 목포의 전라도 수영을 해남의 황원으로 옮겼다.

또한 함평군 향토문화지 창간호와(1989) 한국 향토사 전국협의회지 1집(1989)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맹사성, 윤희 등이 찬진한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관방수어항에 수군처치사영이 무안의 대굴포(당시는 무안군이었으나 지금은 함평군에 속함)에 있고 대선 8척, 중선 18척, 수군 1895명, 초공(梢工) 21명이 있었다고 했고, 무안현의 관방항에 대굴포 수군처치사영에 병선이 정박해 있다고 했다.

아래 그릴 ○표가 대굴포다. 지금이야 모두 농경지로 쓰고 있지만 당시에 대굴포가 있었던 곳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 대굴포 선소(대굴포(영산강, 구진포에서 목포까지).출처: 우리 배 고기잡이)

한편 2003년 7월 10일부터 전남매일(광주소재, 정철 기자)신문에 연재된 기사 중에는 대굴포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이 제작되었다고 했으며, 태종 15년에 병조의 좌대언으로 있던 나주 출신 탁신(卓愼)의 상소에 의해 성능이 강화되고 외형이 개조되었고, 나주 노안 출신 신숙주에 의해 중국, 일본, 유구국 등의 선박에 장점을 살려 거북선을 개량하였다(거북선은 몽충에서 본을 떠서 만들었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다.).

왜구의 소멸로 인해 그 효용이 떨어져 200년의 세월이 흐르다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1588, 곤재의 도이장욕설(島夷將慾說))과 그의 문도인 송재문, 오익공, 나덕신, 나덕영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 박만천, 나치용, 이설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함대곡마을)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재민의 <해광집>, 오익장의 <사호집>과 <번앙집>, 의병장 김천일의 종사관 임환의 <습정유고>, 임전의 <명고집>, 나대용, 박만천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대굴포는 고려 말 나주 문평 출신 정지와 부안 위도 출신 이희가 왜구 방어책 10조를 통해 배 제작의 최적지로 지목하였으며 바다에 인접한 선소보다 내륙에 있는 대굴포의 선소가 왜적의 급습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고려 말에 제작된 거북선이 200여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나대용, 손재민 등에 의하여 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전함 제작과 해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정지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광산 탁씨, 홍주 송씨, 예안 이씨, 광산 김씨, 나주 나씨, 금성 나씨, 담양 김씨, 무안 박씨, 함평 이씨, 함양 오씨, 양성 이씨, 고령 신씨 등을 통해 거북선의 설계도나 제작기술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으로 본다면 이순신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짧은 기간에 거북선을 창제했다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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