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항동에 사시는 반귀분님(80세)은 창간주주는 아니나 아드님이 창간주주십니다. 아들 유재관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한겨레주식을 남겨주고 갔습니다. 유재관님은 91년 노동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겨레가 창간할 때 대학생 자녀 3명을 두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재관님이 빚을 내서라도 주주가 돼야 한다고 해서, 정말로 빚을 내서 가족 4명 모두 약 100주씩 샀다고 합니다. 남편 분도 먼저 세상을 떠나서 아들의 주식과 남편의 주식을 양도받아서 현재 200주가 넘는 주식을 갖고 계십니다.

▲ 반귀분 어머님

반귀분님은 한겨레 주주가 된 것에 대해서 “애휴~ 나 이야기 안 해”라고 반복 하십니다. “우리 아들이 열렬하게 운동했지만 이 세상은 더럽게 흘러갔다.”고 하십니다. 아들이 그토록 원했던 사회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다 싫고 한겨레도 밉다고 하십니다. "한겨레신문도 직원들 먹고 살기 위해서 일 하는 것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살기가 힘들어서 한겨레 주식을 팔 수 있게 해주거나, 그렇지 못하면 회사가 나서서 주식을 사주었으면 하고 바라셨습니다.

반귀분님은 아들이 먼저 간 후 “나 산 건 말도 못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힘들게 지내셨습니다. “내 아들은 이 나라를 위해서 죽었다.” 생각은 하지만 현실에서 겪는 외로움과 그리움은 설명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자꾸 “말 하지 마. 속 터져”라고 하십니다.

왼손에 묵주반지가 선명한 반귀분님 가족은 모두 천주교 신자입니다. 반귀분님은 평화신문에 ‘다시 올 수 없는 길’ 이란 아드님에 대한 글을 써서 장려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또 2005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젊은 평신도 양성기금으로 써달라고 천주교 우리신학연구소에 기탁도 하셨습니다. 매년 천주교에서는 5월 '천주교 열사 합동 추모 미사'를 엽니다. 1999년부터 시작한 미사입니다. 작년 미사에는 반귀분님도 참석하셔서 인터뷰도 하셨습니다. 종교로부터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민가협>에도 가입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없을까요? 고통을 덜어드리지 못하더라도 한겨레 주총에 오셔서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운 아들을 생각하고 위안을 받고 돌아가실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없을까요?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한 상품권이 있습니다. 한겨레에서 그런 상품권을 주총 참가 선물로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기부박스를 만들어서 상품권을 기부 받는 겁니다. 그렇게 모인 상품권을 살기 어렵고 마음이 외로운 이들에게 전달한다면 더 뜻 깊은 일이 되지 않을까요? 아마 총회에 오신 한겨레주주님들도 흐뭇해하시며 적극 동참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한겨레 주주가 누굽니까? 약자를 위한 신문이 되어달라며 없는 주머니도 터신 분들 아닙니까?

*참고 : 현재 이천민주공원(민주열사추모공원)에 묻혀 있는 유재관(루가. 1962년 생, 1991년 사망, 사망 당시 29세)열사는 1981년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수배당하고 옥살이도 했습니다. 1983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재입학하여 1985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우아미가구에 취업했다가 해고당합니다. 이후 인천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하면서 1990년에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에서 활동합니다. 1991년 6월 27일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 인천대가 침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재관님은 '인사연'도 침탈당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피하다가 추락하여 운명하였습니다(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진 : 이동구 에디터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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