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살라 국경, 필리피, 카빌라

[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201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1일까지 12일간 진행되었던 <그리스 터키 문화기행-유럽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의 동행 강사 강응천선생 답사기를 편집한 것이다.

2015년 11월 3일 (화)

입살라 국경

터키가 발칸 반도를 향해 달려드는 괴조 같다면, 그리스는 꼭 괴조에게 뜯겨 너덜너덜해진 짐승의 살점 같다.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에게해 양안은 유난히 섬들이 많아 더욱 그런 인상을 준다. 그만큼 지각 변동이 많았다는 뜻일 거다. 그런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는지 역사적으로도 충돌이 많았다. 기원전 1250년경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 기원전 6세기의 페르시아 전쟁,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이 그랬다.

우리는 바다가 아닌 육지를 통해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갔다. 마르마라 해변을 거치는 E-84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250킬로미터를 달리면 국경 도시 입살라가 나온다. 이 길은 페르시아 전쟁 당시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원정군이 그리스를 침략하러 가던 길이고, 알렉산드로스가 거꾸로 페르시아를 치러 가던 길이다.

터키는 81개 주(İli)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유럽 지역에 있는 것은 4개뿐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 이스탄불 주를 지나 테르키다 주, 에디르네 주를 거쳤다. 창가로 보이는 전원 풍경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롭고 풍요로웠다. 터키가 세계 6위의 농업 국가로 모든 농산물을 자급할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오후 12시 20분경 도로변에 있는 테르키다의 시골 식당에 들러 양고기와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새끼양, 스테이크, 테르키다식 고기만두, 시골 아침식사’라고 크게 써 붙인 허름한 식당, 개가 짖어대고 닭들이 종종걸음 치는 마당, 풍성한 꽃과 나무 등이 우리 시골의 국도변 식당 이미지와 포개졌다.

그러나 잠시 후 도착한 입살라 국경은 그러한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문소에 근접해서는 그동안 타고 갔던 버스에서 내려 국경 전용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한때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였던 나라들답게 국경의 검문은 철저했다. 여권도 일일이 검사했다.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이런 번거로움은 사라지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럴 일이 있을까 싶다.

필리피(Φίλιπποι)

입살라 국경까지는 마르마라 해를 끼고 달렸지만, 그리스로 넘어가자마자 바다가 에게 해로 바뀌었다. 서쪽으로 200여 킬로미터를 더 달려 동북부의 유적 도시 필리피에 도착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세운 도시였다. 인근의 금광을 관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에서나 로마에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곳이다.

▲ '필리피'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기원전 360년 필리포스 2세는 카발라에 도시를 건설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 도시명을 필리피로 정했다.

번영을 누린 도시답게 필리피는 비교적 풍부한 고대 도시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원형극장, 신전 등을 갖춘 아크로폴리스(업타운), 시장과 공회당이 마련된 아고라(다운타운) 등 마케도니아 시절의 흔적 위에 로마 시대의 포럼(광장)이 포개져 있다. 로마 제국에서는 이 도시를 ‘작은 로마’로 조성하고 관리를 직접 파견해 로마 시의 분신처럼 관리했다. 로마까지 이어지는 에그나티아 로(Via Egnatia)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기독교 공인 뒤에는 기존 신전을 교회로 재활용할 뿐 아니라 새롭게 거대한 교회도 세워 그 기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필리피는 세 차례의 큰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 첫 번째가 필리포스 2세의 창건, 두 번째는 로마 공화정의 막을 내린 필리피 전투, 세 번째는 바울의 전도였다. 필리피 전투는 기원전 42년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 세력과 카이사르의 복수를 내건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동맹이 벌인 마지막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 세력이 승리함에 따라 로마는 제국으로 줄달음치게 된다.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위해 트로이에 갔다가 49년(또는 50년) 그곳에서 신비로운 환영을 보고 유럽으로 방향을 바꿔 필리피에 들어왔다. 그때 조개껍질에서 추출한 염료를 팔아 큰돈을 번 여인 루디아가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녀가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시냇가에는 루디아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바울은 한 노예 소녀에게 씐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거행하다가 필리피 시민들에게 얻어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마침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렸다. 그러자 간수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가 자신은 처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자살하려 했다. 그때 바울이 그에게 죄수들이 모두 제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자살을 말리자, 간수는 감격해서 바울의 첫 번째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카발라(Καβάλα)

▲ 항구도시 카발라

에게 해에 연한 필리피의 배후 도시.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인이 세운 식민 도시 네아폴리스(‘신도시’)로 역사를 시작했다. 5세기 후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자웅을 겨루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스파르타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아테네 편을 들었다. 그러나 4세기 들어 필리포스 2세가 필리피를 세운 뒤에는 그 세력권에 편입되고 말았다.

필리피 전투 당시 공화파인 브루투스 세력이 기지로 삼은 곳도 이곳 네아폴리스이고, 바울이 유럽 전도를 위해 배를 타고 와 처음 발을 디딘 곳도 이곳이었다. 시내에는 바울 도착을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기념 조형물에 바울 도착의 전설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바울이 트로이에서 환영을 보고 동쪽으로 가는 내용인데, 그 환영은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기독교 공인 뒤 네아폴리스는 그 이름도 기독교스러운 크리스토폴리스로 바뀌어 동로마제국에서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387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뒤에는 깡그리 파괴되어 500여 년 동안 잊힌 도시가 되었다. 1912년 발칸전쟁 이후 불가리아와 뺏고 뺏기는 혈전을 벌인 끝에 1920년대 들어서야 그리스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카발라’라는 이름은 말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유태인 주민이 많았기 때문에 유태인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바다가 객실로 밀어닥칠 것 같은 휴양 호텔 오케아니스(Ὠκεανίς)에 짐을 풀었다. 유럽의 아파트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수동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오케아니스란 그리스 신화에서 대양을 상징하는 티탄(거인) 오케아노스의 딸(바다의 님프)들을 가리키며, 그 숫자는 무려 3000명에 이른다. 발코니에 앉아 님프의 품에 안겨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2부로 이어집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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