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1주년에
나는 그날 ‘다시 촛불혁명을 위하여’를 제목으로 한 시사시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된 후 조국 장관을 칠 때부터 나는 내가 상임대표로 있는 작은 시민단체 <촛불혁명완성연대>를 통해 조국 장관 청문회 방해 비판 기자회견을 하는 등으로 윤석열 검찰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20대 대통령 선거때 윤석열이 후보로 나왔을 때도 결사적으로 윤석열 검찰독재정권의 출현을 막고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위한 이재명 후보 당선을 위해 <촛불행동>과 함께 분투했다. 온갖 술수로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의 당선 무효를 주장하고, 대통령실 용산 이전 추진으로 시작된 국정농단, 망국적 언행과 수작을 들어 그의 퇴진, 탄핵, 타도를 위해 투쟁했다. 그런데, 윤건희 정권이 모든 면에서 망국적 망나니짓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범 민주진영과 시민들은 윤건희 정권 퇴진, 탄핵 투쟁에 폭발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야당과 촛불행동 시민들의 강도가 더해지는 가열찬 투쟁의 결과, 명태균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 때쯤해서 윤건희 정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즈음, 박근혜정권을 몰아낸 촛불혁명에 이은 윤건희정권 탄핵의 촛불혁명을 위해 ‘다시 촛불혁명을 위하여’라는 시사시집을 출판, 보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시집을 출판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당시 나는 집회나 행사가 없는 저녁이면 늦게까지 시를 고르고, 편집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날 밤에도 그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거제도 촛불전사 배윤기 동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윤석열이 기어이 비상계엄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배윤기 동지는 2016,7년 촛불혁명 때 거제도에서 매주 서울에 올라와 광화문 광장 집회에 참여했다. 거제도에서도 올라 오니, 수도권 시민들은 다들 광화문 광장에 모여달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그는 사업용 차량 사방으로 박근혜 퇴진 촉구 광고물을 붙이고, 거제도에서도 맹활약을 했다. 이후로도 그는 윤건희 정권 퇴진 투쟁과 이재명 대통령 시대를 열기 위해 줄기차게 활동했다). 그는 덧붙였다. “젊은 군인들이 따르지 않겠지만, 심각하다.”
나는 설마하면서 TV 뉴스를 보았다. 진짜로 윤석열이 소위 비상계엄령을 발표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잠자리에 있던, 전교조 창립때부터의 동지이기도 한 안해(아내)에게 상황을 말했다. 계엄령은 국회가 해산 의결 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지 걱정이었다. 나를 비롯한 시민들이 국회로 몰려 가야할 것 같았다. 서울의 봄 영화에서 계엄군이 장태완 부대를 공격하려다 시민들이 몰려나와 지켜보니 주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겁이 나서 망설여졌다. 국회로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람들이 많아야 하는데 소수라면 더 위험할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그때 YTN에 이재명 대표가 시민들에게 국회로 모여 달라 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때마침 안해가 대뜸 말했다. “당신은 가봐야 하지 않아?”
안해의 그 말은, 내가 촛불혁명완성연대 대표로서 윤석열 퇴진 투쟁에 앞장 섰으니, 이럴 때 국회로 가서 계엄을 해제 시키는데 참여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미로 들렸다. 또 다른 의미는 체력이 허약한 안해 자신은 가고 싶어도 가기 어렵지만 ‘당신이라도’ 가봐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이재명 대표의 호소와 안해의 말을 거의 동시에 듣고,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가야지!”
나는 가방에 붙이고 다니던 ‘윤석열 탄핵 김건희 구속’자보를 떼어냈다. 그거 붙이고 갔다가 계엄해제를 위해 싸워보기도 전에 계엄군에게 잡혀가면 안되겠다 싶었다. 며칠이 걸릴지 몰라 비상식량도 가방에 넣었다. 여차하면 튀어야 할 수도 있어서 운동화꾼을 졸라 맸다. 안양역까지는 10여분 걸리고, 이미 전철이 끊어질 수도 있는 시간이라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 기사도 비상계엄령 선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은근히 윤석열 편을 드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국회가 하는 일도 없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식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기사에게 참 교육을 했다. “지금 민주당 의원들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많이 받아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잘하고 있다. 윤석열 김건희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운전기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손님한테 더 할수도 없었을 것이고, 아차 싶기도 했을 것이다. 헬리콥터가 국회 위를 날고 있었다.
국회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유튜브, 카톡 등이 열리지 않아서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즉시적으로 현장에 마련된 어떤 시민단체의 방송과 시민들의 전언으로 상황이 공유되었다. 다행히 새벽이 지나면서 국회의원들이 계엄을 해제 의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윤석열이 국회의원들의 계엄 해제를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계엄이 완전히 해제될 때까지 국회 앞에서 날 밤을 세우기로 했다. 1분 시민발언을 지원하라는 방송이 있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발언을 했다. 대략 생각나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다시 촛불혁명 성공을 위해 줄기차게 싸워 온 시민입니다. 저는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이 ”미친 악마“라고 생각합니다. 제 표현이 과한가요? (아니요!하는 시민들의 함성). 미친 악마 윤석열이 마침내 제 무덤을 팠습니다. 윤석열은 반드시 탄핵해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우리가 윤건희 정권을 퇴진 시켜야 합니다. ~ ”
내 발언이 끝나자 다음 발언을 위해 서 있던 대학생이 내 발언이 너무 좋았다며 한편의 시같다고 해서 나는 과찬이라 답했다.
현장에서 이주영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지인들을 만났다. 누구보다 촛불혁명완성연대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는 김삼정, 백순옥 동지를 만나 국회 정문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강추위 속에서 함께 새벽을 맞이한 것이 뜻 깊었다. 윤석열이 결국 국회의 계엄 해제를 받아 들였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전철 다니는 시간이 되어서야 근처 식당에 가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요기를 했다.
그리고 귀가하여 한시간쯤 자고, 오전 11시부터 국회의사당 본당 앞에서 열린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의 윤석열 탄핵촉구 행사에 참석했다. 범국민적 윤석열 탄핵, 내란척결 투쟁은 그렇게 비장한 대단원의 막을 열었다.
그날 밤 나는 아래와 같이 12월3일 계엄날에 대해 의미심장한 시사시를 썼다.
퇴진과 새날은 이렇게 오는 것인가!
-자폭적 비상계엄 퇴치와 다시 촛불혁명
거제도 촛불전사 배윤기 동지로부터 받은 전화.
아닌 밤중에 홍두께라더니
비상계엄이라니!
포고령이라니!
한밤중에 봉창 두드려 부수는 괴담화라니!
주권자 국민들에 의해 구성된 국회가
김건희 특검, 상설특검법 등 추진하는 게
위헌이란 말인가?
조작수사, 콜검 봐주기 수사, 감사 탄핵하는게
국가기관 교란 시키는 것인가?
거금용돈, 뇌물,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한
근거하나 못 밝히는 특활비, 예비비 등 삭감이
내란을 획책하는 것인가?
전시, 사변 또는 국가비상사태, 적과의 교전, 극도의 사회 교란 시 가능한 비상계엄 선포,
말이나 되는가?
정상이 아니고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으니
미친 악마족의 망동 외 무엇이란 말인가?
‘국회가 범죄자의 소굴’된 것이 아니라
본인 부인 장모 측근 용대실과
추한 원내대표의 20개(20억)수수설 근거까지 나온
구킴당이 그 소굴 아닌가?
종북 반국가세력 공작,
반 민주공화국 반 대한민국 세력은
윤통 그 자신.
자유민주체제 전복 획책 세력도
내란, 친위쿠데타 시도한
바로 그 자신 아닌가?
명태균, 강혜경 등 폭로로
‘한달 내 탄핵’, 특검 받을 지경이라
최후적 방탄 특권행사로
불소추권 범주 넘어
자폭적 소추와 탄핵의 길 선택한 게 아닌가?
‘모든 정당활동,
정치적 결사,집회,시위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전공의 등 모든 의료인 본업 미복귀시 처단!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 처단!’
무시무시한 포고령에
겁부터 덜컥, 걱정의 파도 철렁철렁.
선량한 시민들 위축되어
탄핵의 백만 촛불
물 건너가면 어떡하나...
가방 뒷면에 붙인
"건희정권 박살내자" 자보나
가방 속 촛불집회, 민주진영 관련 자료로도
연행되어 취도곤(取盜棍)당하면 어떡하나...
옷차림, 신발 단도리하고
비상식량까지 챙겨
오밤중 4만원 넘는 택시를 탄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만이 살 길이다.
계엄군의 봉쇄를 막아야 한다!
안해도 동감하고 격려한다.
이재명 대표 앞장 서 가며
국회로 모여 달라 호소하고
의장까지
담 넘어, 검거를 피해 본당에 드니
천만다행.
비몽사몽했던 시민들 밀물처럼 밀려들고
의로운 보좌관들과,
일찍이 모여든 수천 국민들과 함께
의원님들 국회 들여보내기
계엄군, 경찰 횡포 못 부리게
소리 치고 응원하고
즉석 시민 발언에도 참여한다.
손발은 얼음장
졸려서 휘청 거리면서도
기적처럼
어마무시한 계엄 해제
새벽과 힘께 맞이한다.
잡힐 듯 잡힐 듯 미끌어지던 탄핵안이
윤통 제 발에 몰리어 발의되고
실패한 친위쿠데타에 내란죄
현행범 체포, 검경수사, 구속이
눈앞에 아른아른
사필귀정은 이렇게
소금땀 흘리는 폭염,
살갗 에이는 추위 몇 해 보내고
오는가 보다.
아직도 그 무도한 철면피에
채이고 넘어지는 일 남았을지라도
마침내 오리라 퇴진의 봄날.
끝끝내 맞이하리
민주 정의 평등 평화
촛불혁명, 대동세상!
(2024.12.4.)
※ 2025년 2월, 나는 위 작품을 포함해, 윤건희 정권을 이겨내고 새로운 진짜 대한민국을 열기까지의 고난과 승리의 역사적 서사시적 기록 [다시 촛불혁명 빛혁명을 위하여]를 출판했다. https://naver.me/xenuQSIe
계엄 전 책 제목은 [다시 촛불혁명을 위하여]였으나, 그 후의 혁명이 빛의 혁명으로 발전하였기에 [다시 촛불혁명 빛혁명을 위하여]가 되었다. 출판을 기념하여 2025.4.24. 국회제1소회의실에서 <촛불혁명완성연대>가 국회의원 10분과 공동주최로 “다시 촛불혁명 빛혁명을 위한대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https://blog.naver.com/cr2017/223854220411
“~위하여”를 강조하는 것은 다시 촛불혁명 빛혁명 완성의 길은 여전히 멀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정영훈 소개
‘80. 고 3때 목포에서 5.18민주화운동 참여
’81. 서울교대 입학. 학원민주화 시위, 군사독재 비판 등으로 무기정학
’85.서울교대 국어교육과 졸업(과 대표로 학회지 창간, 논문 발표 등)
’86.3~서울원당초교사(시험점수 경쟁 위주 교육 반대, 이승만대통령 묘소에 무조건적 학생 참배 묵념 비판, 교육민주화 활동 등으로 12월 해직)/전교조창립조합원(서울초등기획실장 등 역임)
‘87민교협 간사, 대변인 등을 하며 민주화 운동. 복직투쟁, 부당징집취소 투쟁. 글쓰기
‘88~2017.8.도곡초~신길초 교사(교감으로 명퇴)
*40여년 민주정부 수립 노력/ (전)대통령 직속 새교육공동체 교육정책리포터/정의교육시민연합기획실장//전국교사 대표로 교육부, 교사교육개혁정책토론 참석(‘99)
*’95.1.정무제2장관실과 여성신문사로부터 부부평등상/’04.민주화운동관련자 인증/아침마당 등 TV,라디오,일간지,월간지 등에 출연 및 보도
*’93~’04.한국문학예술연구원(시와 소설)/한국학중앙연구원대학원/한양대경영대학원Cyber-CEO과정/서울대 환경지도자 최고위과정 수료
*『참교사로 서기 위해』(1988.거름) 출판 외 논문, 보고서, 동화 등 발표
* 시집 [대통령얼굴이 또 바뀌면(도종환 외)], [민족작가], [못 부친 편지](한국작가회의), 오마이뉴스 등에 시 발표/ 한국작가회의,민족작가연합 회원
* 『촛불혁명,시민의 함성』,『다시 촛불혁명 빛혁명을 위하여』출판
* 21대 대선 선대위 참여: 후보총괄 촛불혁명완성특보단 총괄단장, 빛의혁명시민본부 사회혁신분과위원회 위원장 등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