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무의식의 충돌

여행을 하다보면 뭔가 기억에 남을만한 이색적인 체험을 은근히 바라는 게 여행자 심리다. 하지만 내가 이 낯선 도시에서 겪는 것만큼이나 특이한 경험이 또 있을까? 나는 지금 무의식 세계를 관장하는 영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들이 묻는다.

"무의식과 의식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 줄 아시오?"

이들이 나를 시험하는 걸까?

"의식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빙산 그 자체이니, 무의식이 이기지 않을까요?"

"맞아요. 뭐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무의식 세계 내부에서 서로 다른 무의식끼리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면 누가 이길 것 같소?"

이들이 아예 나를 갖고 놀려고 한다.

"무의식 두 개가 서로 싸우면 그야 더 힘센 무의식이 이기겠지요. 안 그렇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정도쯤이야 하면서...

그러나 중년의 사나이 환멸이 여지없이 나의 기대를 짓밟는다.

"틀렸소. 무의식끼리 싸우면 의식이 선택하는 편이 이기는 거요."

내가 이들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무의식 내부에서 갈등이 있으면 의식이 그 중 마음에 드는 무의식을 선택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무의식 끼리 충돌하여 갈등을 겪을 때 의식이 무의식을 선택함에 있어 인간은 자주 오류를 범하곤 하오. 마치 당신이 20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이들이 나의 과거를 들먹인다. 잊고 싶은 과거가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20여 년 전에 내가 무얼 어쨌다고 그러는 거요?" 나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구원의 여인상을 만나고도 잘못된 판단으로 그 여인을 놓친 적이 있소. 그 이후 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다 그 영향으로 알고 있소만."

나의 아픈 곳을 예고도 없이 찌르고 들어온다. 구원의 여인상이 있긴 있었다.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여인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직후, 가톨릭 사회단체에서 진행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청중들 앞에서 3분 동안 자기소개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말하자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사회 초년생들을 위한 성인 프로그램이었는데 매주 한 번씩 토요일마다 모였다. 약 8주 정도 진행되었고 그 때 그 여인을 만났다.

첫 번째 모임에서 각자 자기소개를 했고, 두 번째 모임에서였나? 커피 브레이크 타임에 그 여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서구적인 미모에 귀엽고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그런데 대화 중에 무심코 내가 질문을 했다.

"실례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대화하면서 상대 이름을 불러야 편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여인이 몹시 실망하는 눈빛이었다.

"제 이름을 모르고 있다니 서운한데요. 지난 번 자기 소개할 때 나는 알았는데."

아차, 싶었다. 관심이 있으면 지난 번 자기소개 시간에 이름을 기억했어야 마땅하다. 자기소개에는 이름과 나이를 반드시 밝히게 되어 있었으므로... <계속>

대표사진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4911.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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