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합리성 안에 내재한 독소

그런데 내가 그 여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더 많았는데, 당시 나는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의 여자를 결혼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이야 연상의 여인이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 주 자기소개 때 연상인 것을 알고는 그 여인의 이름을 대충 듣고 흘려버렸던 것이다.

"아, 네. 그게 제가 기억력이 좀 없는 편이라서요. 특히 사람 이름은 잘 까먹어요."

서둘러 변명을 하긴 했지만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 그러시군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프로그램은 어때요? 들을 만 한가요?"

여인이 나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섭섭했을 것이다.

"들을 만 한데요."

그 이후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하긴 했다.

마음의 끌림과 호의적인 교감은 분명히 있었는데 나의 합리성이 앞길을 가로 막았다. 그 합리성 안에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독소가 있다는 것을 당시의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내면을 살피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도 했다. 배우자가 안 될 여자를 만난다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합리성 안에 내재해 있는 독소로 인해 그 이후 나의 삶이 황폐해지고, 환상의 늪에 빠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 여인과 사귀다가 나중에 가서 '나는 연상의 여인과는 결혼할 생각이 없소'라고 말한다면 그것만큼 무책임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여인에 대한 나름의 배려였고, 자칫 갈등 상황에 빠질지도 모르는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이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도 그 여인을 보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 여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의 모순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깟 두 살 더 많은 게 무슨 대수라고. 연상의 여인이라는 작은 편견 하나로, 나의 감정과 마음을 그렇게도 꽁꽁 옭아매고 있었던 것일까?

더구나 나는 '저 여인과 결혼하는 남자는 행복할 거야'라고 심중으로 미래의 남편감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 당시의 나'보다 더 바보 같은 인간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고정관념만 극복했더라면 그 '행복한 미래의 남편'이 바로 내가 되지 않았겠는가?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갈 즈음 그 여인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설레는 마음이 일었다. 여인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일 영화 같이 보시지 않을래요?"

영화를 같이 보자는 제안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심으로 이미 그 여인을 포기하고 있었다. 나와는 연령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더구나 지난번의 이름 사건도 있고 하여 그 여인도 나를 포기하고 있다고 지레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아, 그게요. 내일... 선약이 있는데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지상 최대의 어이없는 답변을 하고야 말았다. 잠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여인의 눈에 서글픈 듯한 눈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기대에 어긋난 나의 답변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분노도 함께 섞여 있었을까?

물론 자신을 향한 나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했을 것이고, 연상으로서 연하의 남자에 대한 여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상이라고는 해도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려면 마음을 크게 먹고 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결국 그 여인은 내 곁을 떠났고, 나는 그 여인을 붙잡지 않았다.

그 때 무조건 좋아라하고 호응했어야 했다. 더구나 고작해야 영화 한 편이다. 같이 1박2일 여행가자는 것도 아니고, '술 한 잔 하실래요?'도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구원의 여인상을 또 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도록 구원의 여인상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나이 40을 훌쩍 넘기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무의식중에 그 여인을 기준삼아 배우자감을 고르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구원의 여인상에 대한 회상에 잠기던 나는, 무의식을 관장하는 영적 존재들이 갑자기 20여 년 전 나의 과거를 들춘 것은 무슨 의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계속>

대표사진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8024.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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