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아의 주검

어떤 사실이나 타인에 대해 말할 때는 평정심을 잃지 않다가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인간들의 보편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사라진 시체가 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들에 대한 의혹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경청하는 척만 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들에게 너무 내 속을 내비친 걸까? 그들에게 지나친 신뢰를 주어 그들이 나를 만만한 상대로 본 건 아닐까?

그들이 만약 시체를 빼돌려 장기 밀매조직에게 넘기는 전문적인 사기꾼들이라면 사태는 심각하다. 그들의 말이 황당한 궤변인지 아닌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 얼른 경찰서에 신고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나를 순순히 놔줄지도 의문이다.

내가 지른 소리에 놀랐는지 그들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정적이 흐른 후 심각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그윽한 눈매로 나를 보며 입을 연다.

"당신은 환상에 잠길 때는 분명 힘차게 살아있었고, 환멸에 잠길 때도 겨우 꿈틀거리며 살아있었소. 하지만 환상과 환멸이 끝나고 나서 당신의 영혼은 일시적으로 죽음을 맞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그 죽음의 형상이 당신 눈에 시체로 보인 것이오. 영혼의 나이테가 한 주기를 마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영혼의 나이테라니? 잘도 갖다 붙인다. 그러나 내 영혼이 죽어 시체가 되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죽은 적도 없고 내 영혼이 죽었다고 느낀 적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들을 살펴보며 생각을 가다듬어본다.

일단 나는 이 자리를 회피하고 싶지 않다. 경찰서에 신고해본들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하면 나만 미친놈이 될 것이다. 시체가 있었다는 물증도 없고 이들이 시체를 빼돌렸다는 증거도 없는 터에 신고는 의미가 없다. 이들이 말하는 내용과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잘 연결이 안 된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다시 그들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서 내가 나의 시체를 볼 수 있게 된 것인지 알아듣게 설명해주시겠소?"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잘 알려진 수사기법 중의 하나이다. 인·적성 검사에서도 이런 식으로 진위를 가려내곤 한다. 비슷한 질문에 다른 답변이 나오는지를 보고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것이다.

"당신은 환상과 환멸의 순환이 끝난 후 더 이상의 환상이나 환멸에 잠기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자아가 거주할 곳을 잃어 일시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오. 자아의 주검이 바로 당신이 본 시체요."

놀랍게도 자아에 대한 통찰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의 반복된 질문에 드디어 이들이 걸려들었다. 이들의 말에 틈새가 보인 것이다.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다.

"아까는 영혼이 죽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자아가 죽었다고 하니 어느 게 맞는 말이오? 자아라는 것은 영혼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말이오."

나로서는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중년의 사내는 전혀 흔들림 없이 답변을 이어간다.

"자아가 죽을 때 영혼은 그 자아가 자신인 줄 착각하고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러니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오."

이들에게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내가 고도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는 건 아닐까? 이들은 시체를 빼돌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럴듯한 변설로 나를 현혹시키려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들의 말이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들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더욱이 이들은 내가 처한 내면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에겐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의심과 신뢰 사이를 방황하던 나의 마음이 급속히 그들을 신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의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 나는 그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계속>

*대표사진 출처 : http://h21.hani.co.kr/arti/reader/together/43049.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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